타나토스적 충동에 사로잡힌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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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이권우의 책과 세상

타나토스적 충동에 사로잡힌 일본

프로이트는 에로스의 짝패로 타나토스를 꼽았다. 우리 무의식에는 삶에 대한 충동뿐만 아니라 파괴 본능도 있다는 말이다. 우치다 다쓰루와 시라이 사토시의 대담을 기록한 <사쿠라 진다>를 보면 오늘의 일본이 타나토스적 충동에 빠져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우치다는 흥미로운 사례를 들었다. 일본도 지방이 황폐해지기는 마찬가지다. 이에 뜻있는 이들이 지역 활성화 사업을 펼치려 하면, 일종의 토호세력 가운데 반대하는 무리가 있다. 그들은 대체로 3대째 내려오는 여관이나 요정의 주인이다. 지역경제가 무너지면서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는데 상식 밖의 반응을 보인다. 속사정을 살펴보면 이해 가는 면이 있다. 이들은 물려받은 업을 지켜야 한다는 책무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능력이 없지만 스스로 버릴 수는 없으니, 누군가 무너뜨려주길 바라는 숨은 열망이 있었던 셈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오늘의 일본 정치인은 3대조가 설계하고 만들어낸 체제를 물려받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시스템이 낡고 망가졌다. 문제는 다시 세우고 고치기엔 실력도 열정도 없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차라리 이 체제가 해체되길 바란다. 마치 지역 활성화 사업을 반대한 여관 주인처럼 말이다. 일본을 혐오하는 외국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일고의 가치도 없을 터다. 하지만 일본의 지식인이 내뱉은 말이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톺아보아야 한다. 특히 왜 일본의 지배층이 이런 극단의 길을 가고 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우치다는 말한다. “상상을 뛰어넘는 참혹한 사태에 이르면 누구의 책임이니 누구의 잘못이니 하는 말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것이 잿더미로 돌아간 다음에 망연자실하며 제행무상을 느끼는, 그러니까 파국원망이 일본의 전통 무상관(無常觀)에 뿌리내린지도 모른다고 설명한다. 이쯤에 이르면 오늘 일본의 병증이 어느 정도 악화했는지 짐작하게 된다.


소장 사회학자 시라이는 이 지경에 이른 원인을 이른바 영속패전론이라는 프리즘으로 분석한다. 이 개념은 일본 지배층이 2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부인하고 미국에 비굴하게 종속한 점을 가리킨다. 일본 지배층은 패배라는 말보다 종전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전쟁을 일으켰던 집단이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어서 그렇다. 역사의 단죄를 받았어야 할 집단이 지배층이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냉전체제가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미국의 처지에서 소련의 입지를 강화해줄 게 뻔한 좌파에게 권력을 내줄 리 없었다. 비굴한 대미 굴종은 여기서 비롯했다. “일본의 보수 정치세력은 미국의 허락 아래 권력의 자리에 머무를 수 있었던 터라” 미국에 감히 맞설 수 없으니 “일본은 미국에 영원히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셈이다. 일본 지배층이 패전을 숨기는 또 다른 방식은 아시아에서 패배한 사실을 감추는 것이었다. 일본이 침략했던 중국과 식민지배했던 한반도에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전쟁 이후 일본 경제가 재기에 성공하면서 주변국이 타협책을 모색한 것도 이런 경향을 강화했다.


일본이 위기에 놓인 것은 바로 이 구도가 끝장나서다. 먼저 냉전이 종식되었고, 한국과 중국이 눈부실 정도로 성장했다. 이른바 영속패전 체제가 무너졌는데, 새로운 체제에 걸맞은 방책은 나오지 않고 오히려 아베의 ‘전후체제로부터의 탈각’이라는 퇴행적 정책이 여론의 힘을 얻고 있다. 이 정책을 일러 우치다는 일본의 싱가포르화, 북한화라고 지적한다. 싱가포르의 국시는 경제성장이다. 그 모든 것의 가치를 결정하는 잣대는 오로지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는가이다. 성장에 도움이 안되면 민주주의도 필요없다는 식이다. 더불어 북한처럼 핵무장하고 징병제 해서 무서운 국가로 동아시아에서 군림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이 대목에서 다시 우치다는 말한다. “자력으로는 오늘날의 미·일 질서를 바꾸거나 수정 보완할 힘도 없고, 비전도 없기 때문에 전부 엉망진창이 돼버리는 파국이 도래하기를 갈망하고” 있다고.


이런 관점에서 <고질라> 시리즈는 재해석된다. 사토 겐지는 일본인의 아이덴티티는 분열했고 파괴를 간절히 바라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그 무의식을 형상화한 게 고질라라고 보았단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의 상황은 고질라가 스크린에서 튀어나와 일본 본토를 습격한 격이었다고 분석했다고 한다. 우치다는 일본인의 죄책감과 자기처벌 욕망을 형상화한 것이 고질라라고 해석했다. 고질라가 일본을 습격한다는 내용은 근대 일본 시스템이 자리 잡으면서 억압한 것들의 귀환이라고 평가했다. 


두 논객의 날카롭고 거침없는 대담을 읽다가 정신이 번쩍 드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베의 재집권 이후 동북아시아 정세가 요동치는 이유를 알 수 있고, 최근의 무역보복이 뜻하는 바도 눈치챌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의 이익 때문에 역사청산이 이뤄지지 않았고, 영속패전 체제 이후를 준비 못해 위기에 빠졌다는 점은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일제 잔재 청산을 못했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뤄내지 못했다. 아직은 일본만큼 심각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일본 못지않게 큰 위기를 맞이할 것이 확실하다. 


또 있다. 우치다는 극우세력이 극성을 떠는 나라의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프랑스는 전쟁기간에 나치에 협력했기에 패전국가라고 주장한다. 레지스탕스와 드골의 활약을 방패 삼아 비시정권의 과오를 은폐했을 뿐이다. 그 결과 자유·평등·박애의 나라에 극우집단이 나타나 세를 얻고 있다. “어떤 나라에서나 극우 이데올로기가 생겨난 이유는 말하기 어렵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을 억압한 데에 있다는 일반논리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말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역사 청산의 기한이 끝난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되물어볼 일이다. 왜 우리 사회에 다시 극우집단이 준동하는가, 라고.


<이권우 |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