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트디즈니가 ‘마블코믹스’라는 만화출판사를 인수·합병하려 할 때 과도한 인수금액이 주주들 사이에서 문제였다. 월트디즈니가 주주들을 설득한 가장 중요한 논리는 캐릭터의 가치였다. 500개가 넘는 슈퍼히어로의 가치를 현재의 매출 가능성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만큼의 인지도와 팬덤을 만들어내기까지의 총금액을 투자금액으로 환산한다면 인수금액은 타당하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월트디즈니 네트워크로 진입한 마블코믹스는 ‘토르’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헐크’ 등의 독립된 캐릭터를 소개하고, ‘어벤져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등의 연합군까지 꾸준히 학습시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그들의 세계관을 관객에게 각인시킨다. 결국 월트디즈니는 시리즈가 개봉될 때마다 찾아보게 하는 충성스러운 관객 군단을 만들어냈으며, 인수·합병의 투자금액을 상회하는 수익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에도 슈퍼히어로가 있는가? 국내 콘텐츠로 가장 많이 제작된 ‘홍길동’을 들 수 있다. 실사영화와 드라마, 애니메이션, 그리고 여성 홍길동과 주변 캐릭터의 스핀오프까지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임꺽정’ ‘일지매’ ‘전우치’ 등 히어로물도 흥행하긴 했으나 그동안 우리의 슈퍼히어로는 시대의 아픔과 계급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던 ‘도둑들’이라는 한계에서 머물렀다. 확장되는 세계관과 지속적인 캐릭터들을 전략화시킬 범용성이 부족했다. 최근 하일권 작가의 웹툰 <스퍼맨>은 비약과 블랙유머를 곁들인 성인담론으로 한국형 슈퍼히어로를 제안하기도 했다. 강풀 작가의 웹툰 <브릿지>는 강동구 주변에 살고 있다는 여러 초능력자들(강풀 작품에 등장했던 주요 캐릭터들)을 하나의 이야기틀에 모아내 한국형 히어로의 세계관을 실험하기도 했다.
과거 많은 출판사가 기획 출판했던 위인전들은 세계사에서 권력, 전쟁, 정치를 이끌었던 정치인, 군인, 과학자 등이 대부분이었다. 필자도 나폴레옹, 헬렌 켈러, 링컨, 처칠 등의 위인전을 접하며, 위인전의 영웅처럼 되려면 이렇게 살아야 되나 하는 막연한 긴장을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로 갖고 산다. 그러나 요즘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영웅은 아이돌 그룹, 프로축구 선수, 웹툰작가다. 영웅의 의미가 팬덤과 혼재된다. 영웅의 세계관을 삶의 가치와 방향으로 갖고 살아야 할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진정한 영웅 찾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달 초 성수동 에스팩토리에서는 제주의 화가 변시지(1926~2013) 특별전이 열렸다. 그는 일제강점기 제주 서귀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오사카로 갔고, 오사카 미술학교를 거쳐 일본인 스승에게 그림을 배워 21살에 이미 일본 최고 화가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한국의 자연을 그리기 시작했고, 50대 이후 고향 제주에서 그가 보고 느낀 삶과 자연을 그려냈다.
“제주의 매력은 순수하고 단순하며 깊은 원시에의 향수이다. 바다의 약동하는 생명력은 나의 창작 활동의 근원이며 자연의 생이야말로 무한하고 영원한 우리의 꿈이다.” 화가 변시지의 그림은 서귀포 기당미술관을 비롯하여 제주 곳곳에 숨쉬고 있다. 제주의 들판, 파도와 바람, 폭풍, 그리고 그 자연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말, 새를 그렸다. 미술관과 관공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제주의 삶과 자연에 그의 그림이 그대로 살아 있다. 제주를 그려낸 화가 변시지, 그의 그림 속에는 제주의 정신과 과거, 현재, 미래가 여전하다. 이렇듯 우리의 문화영웅이 남긴 역사는 우리의 삶을 지탱해낸다. 그런 시간들을 다음 세대에게 알려야 한다.
BTS의 성숙한 발랄, 손흥민의 밝은 열정, 하일권과 강풀의 멈추지 않는 실험과 도전도 결국 살아 숨쉬는 문화영웅의 역사가 만든 우리의 문화 DNA에서 시작된 것이다. 곧 변시지의 일대기가 만화로 나와 다음 세대와 만날 것이다. 이러한 문화영웅 시리즈가 계속되기를 희망한다.
<한창완 세종대 교수 만화애니메이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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