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팝 음악계에서 근래 들어 가장 잘 나가는 여가수로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 케이티 페리다. 한 앨범에서 무려 다섯 곡의 차트 넘버원 송을 기록한 초대형 대박에다 2008년 이후 해마다 ‘파이어워크’, ‘다크호스’ 등 굵직한 히트곡을 내놓을 만큼 인기 행진은 가공할 기세를 자랑한다. 모든 것을 얻었지만 영예의 그래미상과 관련해서 그의 신세는 초라하다.
수년 전부터 후보에 올랐지만 모조리 수상에 실패했다. 음악전문가들은 케이티 페리가 슈퍼스타이긴 해도 가창력을 비롯한 음악적 역량이 아직 그래미 포상 감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상식 자리에 몇 년째 어김없이 등장해 즐겁고 영광스러운 공연을 펼친다. 역시 트로피와 인연을 맺지 못한 올해에도 ‘가정폭력 반대’라는 시상식의 메시지에 맞춘 새 싱글을 진지하게 노래했다.
지극히 당연한 모습 같아도 국내 음악시상식에서는 거의 목격할 수 없는 장면이다. 우선 우리의 경우는 수상자가 아니면 시상식 현장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시상식에서 연예인과 가수가 있는 장면이 포착되면 올해는 누가 상을 탈지 어렵지 않게 점칠 수가 있다. 이러니 손에 땀을 쥐는 궁금증이 있을 리 없다.
연말·연초에 개최되는 신문과 방송의 연말 가요시상식은 그러한 긴장감은커녕 한 해의 음악계 흐름마저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불완전을 반복하고 있다.
한 해를 빛낸 가수와 노래들 가운데 상당수가 빠져버린다. 가요 기획사들의 과열 경쟁양상이 빚어낸 참극이다. 이를테면 라이벌 기획사의 소속 가수가 큰 상을 받게 되는 것을 알면 절대로 그 시상식 행사에 자사 가수들을 내보내지 않는다.
빅뱅의 태양이 부른 ‘눈코입’과 대세 아이돌 엑소의 ‘중독’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2014년의 빅 히트송이다. 하지만 시상식에서 이 두 가수를 함께 보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최고 대상이 누구한테 갈지 모를 경우는 가능하지만 만약 미리 확정되면 관객들은 둘 중 하나만을 봐야 한다. 반쪽짜리 시상식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상을 독식하려는 듯한 거대 기획사 때문에 대상이 유력하나 거대 기획사에 속해 있지 않은 제3자가 피해 보는 사례도 발생한다. 그럼에도 시상식 주최 측은 슈퍼 아이돌이 소속된 기획사와 손잡고 딴 가수들은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다. 한해와 가요계 전체를 포괄하는 축제는 물 건너간다. 시상식을 주최한 한 관계자는 “파괴력이 엇비슷한 대상을 서너 개 마련하지 않으면 앞으로 행사 자체를 못할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해놓더라도 특정 기획사가 독식하려는 행태는 여전할 것”이라며 고충을 털어놓았다. 이렇게 된다면 굳이 시상식을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여기서 가요시상식 무용론이 고개를 든다.
기획사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고생한 소속 가수에게 큰 상을 타게 해주려는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러한 배타적, 비타협적 태도로 인해 시상식의 축제 분위기는 훼손당하기를 거듭하고 있다. 기획사든 가수든 수상을 못하더라도 시상식 현장을 풍성하게 해주려는 사고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상황을 봐서는 꽤 요원해 보인다. 남이 수상하는 자리에 결코 들러리가 될 수 없다는 식의 편협함 때문이다.
가수 태양이 21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SBS <가요대전>에서 열띤 무대를 펼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이런 현실에서 전체성과 공정함을 바탕으로 축적되는 시상식의 권위는 확보하기 어렵다. 피해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실 음악계가 본다. 가뜩이나 침체된 음악계의 처진 분위기를 반등시키기 위해서는 팬들의 지지를 받는 톱 클래스 가수들이 모조리 출연하는 진정한 축제를 만들어 소비자들의 시선을 음악으로 돌리게 해야 한다.
미국의 그래미가 이걸 잘한다. 잠시 음악을 놨던 사람도 다시 음악을 듣게 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우리 음악계가 왜소해지지 않으려면 시상식부터 제대로 잡아야 할 것 같다. 합심해 큰 모양새로 가야 한다. 우리에게는 수년째 그래미 ‘들러리’를 서고 있는 케이티 페리가 필요하다.
임진모 |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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