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상수동에 둥지를 텄다. 이삿짐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녀석은 다름 아닌 책이었다. 열두 개의 책장에 빼곡히 들어찬 책들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는 다시 읽고 싶은 책. 요놈들은 내년에도 늠름한 자태를 뽐내며 서재를 수호할 것이다. 두 번째는 서재를 떠나야 하는 책. 살생부는 권력자의 수첩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아쉽지만 두 번째 친구들은 중고서점이나 인터넷 장터로 입양보낸다. 거기서도 간택받지 못한 책은 지인에게로 또는 도서관으로 향한다. 거창한 이별의식 따위는 없다. 얼빠진 사람처럼 수초간 멍하니 책표지를 바라보는 게 의식의 전부다. 고민의 시간이 늘어지면 판단이 흐려지기 십상이다. 그렇게 수많은 책을 떠나 보냈다.
작년에도 변함없이 이사를 핑계로 수십 권의 책들과 헤어졌다. 그중에서 타지로 보내기가 유독 아쉬운 작가의 소설책이 있더라. 모 일간지에 보수의 재탄생을 외치는 글을 실은 해당 작가를 향한 격문이 저잣거리를 떠도는 중이었다. 격문을 비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핑계로 책을 정리하기는 영 꺼림칙했다. 특히 장편 <젊은 날의 초상>은 문학에 탐닉하던 대학 시절에 등장한 성장소설이었다. 수려한 문장과 지적 감성이 넘치는 소설 속의 풍경은 방황하는 청춘에게 작은 물음표를 선사했다. 어떻게 할까. 일주일간의 장고 끝에 결론을 내렸다. <젊은 날의 초상>과 <사람의 아들> 두 권만 남기고 나머지 작품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완전히 남거나 사라지는 고민을 모두 한 끝에 내린 중도스러운 결정이었다.
연말 내내 방출할 소설을 다시 읽었다. 문학적 미사여구가 넘치는 초기작은 정치적 편향이 갈기갈기 드러나는 후기작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초기작은 허무주의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이른바 비운동권 문학이었다. 거리로 뛰쳐나가 화염병을 던질 만한 배짱이 없던 내게 그의 작품세계는 아웃사이더의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 그렇게 정치와 역사에 무감했던 1980년대가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문학서적에 탐닉했던 독서취향은 사회과학서로 털갈이를 하고, 스스로가 사회적 변방에서 서식하는 이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데 무려 2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 갔다.
글쟁이의 꿈이란 뭘까. 아마도 오랜 세월 독자의 뇌리에 남을 만한 빛나는 소설을 완성하는 것일 테다. 그렇게 독자, 세상, 소설이 삼위일체를 이룰 때 고전이라 일컫는 문학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남은 소설과 사라진 소설. 지금 우리 사회는 서재를 지키는 오래된 소설 같은 존재가 절실하다. 언제나 서재 한구석에서 평등하고 건강한 미래를 밝혀주는 오래된 소설 같은 사람. 아마도 그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묵묵히 정의로운 길을 걸어갈 것이고, 개인의 욕망보다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맑은 눈을 가진 인물일 것이다. 어지러웠던 2016년을 마감했다. 다시 오래된 소설을 펼치며 2017년을 이끌어 갈 ‘초인’의 등장을 기원해 본다.
이봉호 문화평론가 ‘음악을 읽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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