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시대’에 ‘을’로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고군분투기를 그린 JTBC 금토드라마 <욱씨남정기>가 2년 전 같은 소재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tvN 드라마 <미생>과 비견되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미생>이 비정규직 인턴사원 장그래(임시완)를 중심으로 직장인들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그려내 호평 받았다면, <욱씨남정기>는 대기업의 만년하청업체 러블리 코스메틱이 ‘갑의 횡포’에 맞서고자 하는 자립기를 유쾌하게 그려내 ‘코믹판 <미생>’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욱씨남정기>는 통쾌한 판타지를 이끌어나가는 주인공이 능력 있고 당당한 슈퍼영웅 여성노동자라는 점에서 <미생>보다는 KBS <직장의 신>에 더 가까워 보인다. 부조리에 순응하지 않고 할 말은 하고야 마는 “거침없는 여자” 욱다정(이요원)의 캐릭터는 상사도 쩔쩔매는 ‘슈퍼갑 계약직’ 미스김(김혜수)을 연상시킨다. 욱다정이 분노하는 현실이 많은 부분 성차별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직장의 신>에서도 비정규직의 열악한 조건은 대부분 여성의 몫이었으며, ‘미스김’이라는 자발적 익명은 어엿한 이름을 지녔음에도 “언니” 혹은 “아줌마”로 통칭되는 여성 노동자의 비가시성을 비판했다.
<욱씨남정기>의 비판은 한층 더 직접적이다. 1회에서 욱다정이 처음 극에 등장한 이후 약 10분 동안 이 시대의 여성들이 겪고 있는 온갖 종류의 성차별을 압축해 보여준 에피소드는 단적인 예다. 신제품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황금화학에 입성한 러블리 코스메틱 직원들은 앞서가는 욱다정이 담당 팀장인 것도 모른 채 멋진 뒤태에 음흉한 시선을 보내고, 발표 장소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커피서비스를 주문한다. 욱다정의 이혼 경력과 ‘지랄 맞은 성격’을 운운하는 장면에서도 뿌리 깊은 편견이 드러난다.
KBS 극본공모로 데뷔한 윤난중 작가 대본의 드라마 ‘직장의 신’._경향DB
이러한 차별과 폭력에 맞서는 자세 역시 욱다정 쪽이 좀 더 급진적이다. 미스김의 경우 스스로 감정을 거세한 로봇의 태도로 여성에게 과도한 감정노동까지 강요하는 사회를 무력화시켰다. 욱다정은 한발 더 나아가 얼굴에 물세례를 받으면 같이 물을 뿌려 맞받아치고, 룸살롱 접대를 강요하는 현장에서 양주병을 휘두르며 ‘개저씨’들을 당황시킨다. 이 같은 대처가 욱다정의 표현처럼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전략이라는 것은 중요하다. 말 그대로 그녀가 당한 남성적 폭력에 대한 ‘미러링’이다. 능력을 발휘해 고속승진을 해도 ‘소파 승진’이라는 험담에 휩싸이고, 일에 몰두하는 것이 이혼 사유가 되는 현실에서 욱다정은 차라리 ‘자발적 미친년’이 되어 불편한 존재가 되는 길을 택한다.
그리하여 <욱씨남정기>는 사회에서 생존하려 사투하는 ‘이중의 을’인 여성이 어떻게 ‘마녀’가 되어 가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애초에 다른 선택지가 많지 않다. 워킹맘 한영미(김선영)처럼 슈퍼우먼 콤플렉스에 시달리다 “화병 일보 직전”까지 가든가, 일찌감치 선배들의 험난한 삶을 목격한 장미리(황보라)처럼 “자신을 평생 먹여 살려줄 남자”를 찾아 애교와 순응의 처세법을 택하든가. ‘마녀’가 되지 않는다 해도, 여성이 자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남는 길은 요원하다.
욱다정이 계속해서 ‘자존심’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은 결국 ‘갑질사회’에 저항하는 을의 반란기이기 전에,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최소한의 존엄을 찾고자 하는 여성의 생존기이기 때문이다.
김선영 | TV평론가
'TV 블라블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금 TV에선]‘동네변호사 조들호’…법조계 최강 슈퍼히어로 (0) | 2016.04.10 |
---|---|
지상파의 길, ‘마리텔’의 길 (0) | 2016.04.03 |
[로그인]‘태양의 후예’와 대리 애국 (0) | 2016.03.24 |
‘시그널’이 우리에게 보낸 신호 (0) | 2016.03.20 |
[지금 TV에선]‘프로듀스101’과 최종병기 소녀들 (0) | 2016.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