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트렌드 vs 클래식]10년이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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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김경의 트렌드 vs 클래식]10년이란 시간

얼마 전 새 책을 내고 나는 자꾸만 남편과 시댁 쪽 눈치를 보고 있다. 초반에 어딘지 가난한 구석이 있는 남자가 좋다며 남편과의 연애 얘기를 슬쩍 풀어 놓고 제목을 턱하니 <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로 짓는 바람에 남편이 졸지에 ‘패배자’가 됐기 때문이다. 



“알잖아? 예술을 돈벌이로 하는 자들 말고 진짜 예술가는 다 패배자라는 거.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절대적인 지점과 싸우는 사람들, 그래서 실패할 것이 분명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분투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예술가잖아. 내가 ‘자코메티가 웃겨’ 꼭지에서 썼던 것처럼. 기억나지? (“알아, 하지만 사람들은 너처럼 그런 생각 안 해!” 하는 남편의 대꾸에 약간 당황해서) 뭐, 뭐, 자코메티만 그런가? 온 세상이 다 알 만큼 엄청나게 성공한 피카소조차 분명 실패한 부분이 있었잖아. 당신이 좋아하는 카프카도 그렇고. 위대한 천재였지만 그 자신은 늘 패배의식에 절어 살았던. 그 얘기를 책에 좀 더 쓸 걸 그랬나? 아, 내가 왜 그걸 안 썼나 몰라. 꼭 써야만 했던 이야기인데, 멍충이!” 하며 내가 내 머리를 쥐어박는다. 쿵, 소리나게. 그러자 남편이 웃는다. 다행이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사실 남편을 믿었다. 내가 10년 전 쓴 책 <뷰티풀 몬스터>를 읽고도 나라는 여자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 줄 수 있는 남자는 정말 흔치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책을 쓰고도 내가 무사히 시집갔다는 사실에 독자들이 이제 와서 매우 쇼킹해할 정도다. 그만큼 무시무시하게 솔직한 글이었다. 안다.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일하는 자유롭고 솔직한 ‘비치’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서른 살 여자의 도발이 누군가에게 통쾌하고 매혹적으로 보였을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재미는 있는데 배알이 뒤틀리는 욕지기를 동반했다는 거.



그러고보면 지난 10년 동안 나라는 인간 참 많이 변했다. 10년 전의 나와 10년 후의 나는 마치 다른 종류의 인간처럼 여겨질 정도다. ‘일부일처제는 인간의 타고난 정서에 반하는 대단히 불우한 제도’라며 결혼을 반대하던 여자가 지금은 에밀리 디킨스의 말을 빌려 ‘창조된 모든 영혼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서 마치 수호천사처럼, 믿을 수 있는 단 한 명의 친구처럼 계속해서 지지하고 보호해 주는 것이 바로 결혼이라며 찬성하고 있다. 



영혼이라니, 결코 실소 없이는 입에 담을 수 없는 단어인 양 냉소하던 서른 살의 여자가 이제 마흔이 되어 ‘계급적 구별짓기’가 아니라 ‘영혼의 구별짓기’가 바로 취향이라며 자신이 영혼을 걸고 사랑했던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별일이다.



‘여전해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다’는데 나는 그것들 덕분에 이만큼 변했다. 그런 내가 고맙고 약간 기특하다. 나이가 마흔이나 됐는데 아직도 ‘어리석은 대중을 유혹하기 위한 도금으로서의 유행’이 필요하다 우기고, 멋은 풍기는 게 아니라 내야 한다고 큰소리치고, 여자에게 가장 좋은 테라피는 쇼핑이라고 유혹하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술꾼들은 마시는 술에 의해 인생이 변한다는 문장을 발견하고는 기왕이면 와인을 즐겨 마시는 사람들과 어울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는 유치하게 위악적인 글을 쓰던 서른 살의 나로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주절대고 있었다면 아마 내가 내 손으로 주리를 틀듯, 독 묻은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싶었을 거다.



10여년 전 운 좋게 투자자를 만나 <키드캅>이라는 아주 한심한 아이들 영화를 만들어서 완전히 쫄딱 말아먹은 후 오래 반성하고 그 빚을 갚으려고 <황산벌>과 <왕의 남자>를 만들었다는 이준익 감독이 언젠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봐 친구, 반성하지 않는 인간은 개·돼지나 마찬가지야. 혹시 실패를 두려워하는 거야? 그걸 하지 않았다면 반성도 없는 거야. 나는 지금도 매일 실언하고 매일 실수해. 일부러 성장을 위해서 반성할 거리를 만든다고 할까? 그래 궤변일지도 몰라. 아마 궤변일 거야. 하지만 그거 알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은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부터 가장 멀리 간 인간이라는 거.”



마흔의 나는 서른의 나처럼 예리하지 않다. 피곤한 도발과 열정을 멀리하고 차라리 권태를 즐길 수 있는 나이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덜 재밌고 덜 흥미로운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난 그 모습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서른 중반쯤부터 결핍을 극복해서 성공하는 게 아니라 더 잘 실패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왔고 그 생각을 삶에 적용시키고 있는 와중이라 패배하는 삶이 두렵지가 않다. 전혀는 아니고 거의.



하기야 지난 10년 동안 나만 변한 게 아니다. 시대도 변했다. 10년 전 “4·19가 뭐예요?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생일인데 우리 춤추러 가요” 했던 낸시 랭이 이제는 ‘구국의 적, 종북주의자’가 되어 밤낮없이 신상 털리는 신세가 됐다. 한때 사랑했고 한동안 미워했지만 이제 다시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낸시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팝아티스트 낸시랭 (경향DB)



“낸시야, 이제야말로 니가 아티스트로 보인다. 거짓말도 하나의 재능일 수 있는 컨템포러리 아티스트. 남의 작품을 훔쳐다 전시회를 여는 카텔란 같은 자의 재능도 높이 사는 세계에서는 그런 거짓말쯤이야 애교지.” 건투를 빈다.



김경 |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