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하는 역사학자가 남긴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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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이권우의 책과 세상

실천하는 역사학자가 남긴 유언

“민족은 상상되었다.” 이 구절을 읽으며 정신이 번쩍 들었던 기억이 난다. 평소 민족이라는 말에 양가감정이 들었다. 식민지 시절 제국주의에 맞선 민족은 해방의 개념이었다. 이 한마디에 한반도의 청년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투쟁의 대열에 나섰다. 하지만 민족이라는 말에는 공동체 내부의 갈등을 무화하는 부작용이 있다. 민족의 적을 내세우면 하나로 뭉치기에는 좋지만, 그 한 뭉치 안에 그어진 균열과 갈등은 보지 못한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한참 고민할 적에 읽은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된 공동체>는 그야말로 눈을 가린 비늘을 벗겨주는 지적 충격 그 자체였다.

 

그 책을 읽으며 혀를 내두르는 것은, 책과 신문으로 대표되는 인쇄자본주의와 민족주의 탄생의 관련성을 탐색해낸 주제의식과 더불어, 엄청나게 많은 자료를 섭렵한 학문적 성실성이었다. 도대체 한 개인이 어떻게 이 숱한 언어로 된 1차 자료를 다 읽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관점을 내세울 수 있을까 싶었다. 물론, 그럴 때 흔하게 내뱉는 말이 있다. 이 사람, 천재로군! 나도 그 한마디로 지은이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다했다고 여겼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최근 미친 듯이 읽어젖힌 책이 <경계 너머의 삶>이다. 척박한 독서풍토에서 베네딕트 앤더슨의 자서전이 나올 줄은 몰랐다. 우리 출판계는 평전은 자주 기획하지만, 자서전에는 인색하다. 그런데 내 손에 그의 자서전이 쥐어졌으니, 얼마나 신이 났겠는가. 이 책이 나온 배경을 읽으면서는 일본의 독서문화가 부러웠다. 내용인즉슨, 이 자서전을 기획한 것은 일본의 한 출판사였다. 그에게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받은 교육, 미국의 학자로 체험한 것들, 인도네시아, 시암, 필리핀에서 했던 현장연구, 그리고 서구의 대학과 즐겨 읽는 책들을” 주제로 자서전을 써달라고 요구했다. 일본어를 몰랐던 그는 일단 영어로 쓰고 코넬대 제자인 가토 쓰요시 교수가 일본어로 번역하기로 했다. 이런 공을 들여 책은 일본에서 2007년에 출간되었고, 영어판은 2015년에 저자 수정을 마쳤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사뭇 극적인데, 그는 이 작업을 마치고 사망했다. 국내에 나온 책은 바로 이 영어본을 원본으로 삼았다.

 

그는 1939년 중국의 쿤밍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국에 맞서 독립투쟁을 한 가계의 자손이었고, 어머니는 영국 출신이었다. 다섯 살 무렵 미국으로 갔고, 아일랜드로 넘어갔다가 이튼을 나왔고, 케임브리지를 졸업했다. 이후에 다시 미국으로 가고 동남아시아를 연구하러 인도네시아, 타이, 필리핀을 돌아다녔으니, 그야말로 세계인이다(꼭 맞지는 않지만 이시구로의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뱅크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삶의 전환점은 코넬대학 정치학과 조교로 자리 잡은 1958년이었다. 이 대학에는 인도네시아 현대사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 조지 카힌이 있었다. 아직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지 못했던 그는, 신념과 정열이 넘쳐났던 카힌 교수처럼 뛰어난 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책에서 가장 관심 있게 찾아본 대목은 그의 어학능력이 어디에서 비롯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동남아시아는 인종, 종교, 언어가 각양각색이다. 이를 연구하려면 각 지역의 언어에 통달해야 하는데, 나 같으면 초저녁에 포기했을 듯싶다. 굉장히 다양한 요소가 작용해 언어의 달인이 되었지만, 가족사에 국한해도 무척 흥미롭다. 일단 그의 아버지가 언어 천재였다. 머리가 좋았으나 역마살이 끼었던 아버지는 21살에 중국 해관에 입사했다. 이 기관에서 연 엄격한 중국어 교육 과정에서 늘 수석을 차지했다. 어머니는 독서광인 데다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잘했다. 부모님 서재에는 중국, 일본,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독일 작가의 작품이 꽂혀 있었다. 중국에서 함께 산 가정부는 프랑스어를 쓰는 베트남 여성이었다. 집안에서 이미 다양한 언어를 배우고 익힐 수 있었던 셈이다. 아일랜드에서는 어머니가 라틴어를 배우도록 해주었다. 그 덕에 “나는 라틴어를 사랑하게 되었고, 처음부터 나는 언어에 재능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현장연구는 언어뿐만 아니라 이 지역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마침내 인도네시아말로 꿈도 꾸게 된 그는 기층 민중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며 새로운 사실을 마주한다. 점령군 출신인 마에다 다데시 전 해군소장을 찾아낸 것은 특기할 만하다. 네덜란드 지배보다 일본 지배가 차라리 나았다는 여론을 접하면서 추적한 끝에 만난 인물이다(딱 맞아떨어지지 않지만, 최인훈의 <태풍>에 나온 오토메나크 중위가 떠오른다). 일본의 패망과 미국의 진주 사이에 일군의 일본 해군이 보인 놀라운 행동이 인도네시아 독립에 결정타가 되었다는 증언이 나온다.

 

기념비적 저서 <상상된 공동체>에 대한 회고도 담겨 있다. 먼저 이 책은 영국 지식인들을 상대로 썼다는 점을 강조했다. 당시 민족주의에 대한 주요 논쟁은 거의 영국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책 앞부분에 보면 찰스 스튜어트라는 왕이 나온다. 본디 찰스 1세라 써야 하는데 일반인처럼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다 영국 지식인을 조롱하고 풍자하기 위해서였다니, 역시 알아야 보이는 법이다. 민족주의가 유럽에서 태어나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는 편견을 바로잡으려 했다는 점, 16세기 유럽에서 쏟아져 나온 책을 마르크시즘적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했다는 점, 민족주의가 한낱 개념체계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비판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에릭 홉스봄은 자서전 <미완의 시대> 마지막 구절을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버리지 말자”며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고 적었다. 앤더슨은 자서전 끝 구절에 그 무기가 무엇인지 말했다. “연대하라!” 실천하는 역사학자들의 유언에서 살아갈 길을 엿본다.

 

<이권우 도서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