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퍼블리셔스 서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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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산책자]퍼블리셔스 서클

대한출판문화협회(KPA)는 국제출판협회(IPA), 국제지적재산권기구(WIPO)와 함께 개발도상국의 출판인들을 지원하는 퍼블리셔스 서클(Publishers Circle)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 출판사들이 돈을 모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출판인들을 초청하고 그들에게 우리나라의 출판 시스템과 운영방식, 저작권의 구매와 거래 방법 등을 교육한다. 퍼블리셔스 서클은 전 세계적으로 운영된다. 유럽의 출판사들은 아프리카의 출판사들과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비상교육이 첫 번 프로그램을 주관하고 다른 출판사들이 다음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해방과 함께 설립되어 지금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현암사, 을유문화사 등이 내년이면 75주년을 맞이하고 한글세대가 주축이 되어 설립해 우리나라 출판을 이끌어 온 창비, 문학과지성사, 민음사 등이 반세기를 지나고 있는 우리 출판의 전통을 생각하면 KPA가 개발도상국의 출판사들을 도울 자격은 충분하다. 우리 출판사들이 그동안 책을 만들고 독자들을 만나온 경험들을 전하는 일은 지구촌 가족들이 더 좋은 내용의 책을 만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 출판사들이 이렇게 맺은 인연을 오래 이어가면서 아세안 지역의 출판사들과 폭넓은 교류와 깊은 우의를 다지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나라가 국제적인 저작권 보호와 거래의 기반이 되는 문학과 예술적 저작물의 보호를 위한 베른협약에 가입한 것은 1996년. 협약의 초기 가입국인 독일이나 프랑스가 1887년, 일본은 1899년에 가입했던 것에 비하면 훨씬 늦었다. 그리고 그 전에는 해외 저작권을 존중하는 쪽보다는 좋은 책을 소개하는 데 훨씬 더 집중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출판사들이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전 세계를 상대로 저작권 수출을 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우리가 누렸던 유예기간이 도움이 되었다. 물론 지금은 개발의 길에 있는 국가의 출판사들이 불법 복제를 통한 베끼기가 아니라 콘텐츠 생산 능력을 키우는 방식으로 방향을 잡고 작은 액수라도 저작권 거래를 통해 출판 콘텐츠를 확보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하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이 오를 사다리를 걷어차서는 안된다.


선진국이 환경오염, 노동자 저임금 등의 사다리를 타고 지금의 자리에 오른 후 개발에 막 나선 나라들에 강한 환경 및 노동규제를 시행하는, 즉 선진국이 타고 오른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일은 숱하다. 혹시 이들을 불러 저작권의 중요함을 알리는 일이 이미 경쟁력을 갖춘 우리가 그들의 사다리를 없애는 일은 아닐까? 그들이 국제적인 출판 네트워크 속에서 그 관행을 따라 저작권료를 적절히 지불하면서 스스로 경쟁력이 있는 책들도 만들 수 있도록 훈련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을 한다. 트럼프의 미국이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고 중국과 이익을 다투면서 환경문제를 등한시하는 것이 미국의 일부 유권자들에겐 이익이 되는 일일지는 모르지만 그래서는 보우소나루의 브라질이 추진하는 아마존 개발을 막을 방법도, 명분도 없다. 아마존 개발을 막지 않으면 지구의 허파는 불타버리고 산소가 부족한 지구에서 우리는 숨이 막혀 죽을 수밖에 없다. 당장 배불리 먹고 죽어 때깔이라도 좋기를 바라는 심산이 아니라면,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이렇게 빼앗아도 좋을까? 


KPA는 우리에게 돌아올, 혹은 선진국에 지불해야 하는 저작권료만 강조하지 않고, 이번에 참가하는 출판사들이 경쟁력 있는 책을 만들 수 있는 방안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 문제를 다음달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IPA 총회에서도 다룰 생각이다. IPA 총회에서 다룰 의제들과 심의 결과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다. 러시아출판협회는 올해도 회원사가 되지 못할 것 같다. 러시아출판협회에 대한 자료들이 이들이 독립성을 갖춘 민간 기구가 아니라 정부의 영향력 밑에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출판과 표현의 자유를 갖고 있지 않으면 회원으로 받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원칙에 어긋난 회원국 중국은 역시 정부의 방침에 따라 사드 이후 한국 책을 한 권도 번역하지 않고 있다. 3년 넘게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해도 묵묵부답인 이유는 출판사 차원에서 어찌할 수 없는 그네들의 구조 탓이겠지만 노력을 그만둘 수는 없다. 총회에서 만날 일본의 출판사들과 한·일관계의 경색을 넘어선 교류의 방법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자리를 갖자고 제안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거대 출판사들이 지나친 이윤 추구로 인해 우리 대학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도 의제로 제안할 필요가 있다.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에 낀 KPA는 명분과 실리를 함께 챙겨보고자 나름 분투하고 있다.


<주일우 이음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