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더블린 사람들’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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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기자칼럼]‘더블린 사람들’의 문학

더블린에선 눈을 크게 뜨고 걷는 게 좋다. 빨강·파랑·노랑으로 칠해진 고전적 디자인의 문들에 정신이 팔려 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오스카 와일드의 생가나 제임스 조이스 센터를 지나쳐 있을지도 모르니까.


노스 그레이트 조지 스트리트를 뱅뱅 돈 게 몇 번인지 모른다. 유심칩이 고장나 전화기가 먹통이 된 탓에 종이 지도가 유일한 의지처였다. 친절한 ‘더블린 사람들’에게 지도를 들이밀며 ‘제임스 조이스 센터’를 아느냐고 물었지만 매번 다른 답을 듣고 헤매야 했다. 숙소로 돌아와 제임스 조이스 센터의 위치를 확인한 결과, 바로 코앞에서 헤맸다는 걸 알게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문을 닫은 시간이었고, 대문짝만 한 간판 따위는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시도 끝에 제임스 조이스 센터를 찾았다. ‘유네스코 지정 문학 도시’ 더블린에 왔으면 대표 작가인 제임스 조이스 센터엔 들러야 하지 않겠냐는 문학기자로서의 책무감 때문이었다. 제임스 조이스 센터엔 작품과 관련된 자료뿐 아니라 음악·미술 작품 등이 전시돼 있었고, 일상적인 낭독회나 투어, 세미나가 열리고 있었다. 인근엔 ‘더블린 작가 박물관(Dublin Writers Museum)’이 있었다.


과연 더블린은 문학의 도시였다. <율리시스>의 제임스 조이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오스카 와일드, <걸리버 여행기>의 조너선 스위프트, <드라큘라>의 브램 스토커, 노벨 문학상을 탄 예이츠, 사뮈엘 베케트 등 세계적인 작가들이 더블린 출신이었다. 유럽 변방에서 오랫동안 영국의 억압에 시달린 고통과 결핍이 위대한 작가를 낳은 토양이 된 걸까.


하지만 시민들이 이웃에 있는 제임스 조이스 센터를 모른다는 건 뜻밖이었다. 우리 역시 이상이나 김수영의 생가를 모르듯이, 유명 작가의 흔적이란 관광객들에게나 흥밋거리일까. 하지만 그 생각이 깨진 것은 다른 곳에서였다.


오스카 와일드의 생가 맞은편 공원엔 시건방진 표정으로 비스듬히 기댄 오스카 와일드의 동상이 있었다. 당대의 스타였지만 동성애 때문에 감옥에 수감되고 비극적 말년을 보낸 와일드의 동상 옆으로 더블린 성소수자 단체에서 심은 나무가 있었고, 다른 쪽엔 그의 동화 <거인의 정원>을 재현한 놀이터가 있었다. 거인 형상의 미끄럼틀에 아이들이 올라타 천진스레 놀았다. 그 순간, 오스카 와일드는 책이나 역사 속이 아닌 더블린의 일상 속에 함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고풍스러운 가게가 눈에 띄었다. <율리시스>에 등장하는 스위니 약국이었다. 172년 역사의 스위니 약국은 그 어렵다는 <율리시스>를 59번이나 완독한 머피가 지키고 있었다. 그는 제자로부터 선물받은 한국어판 <율리시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무료봉사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스위니 약국은 치솟는 임대료 때문에 사회적 펀딩을 받고 있었다. 더블린의 문학은 박물관이 아닌 도시 곳곳에 숨쉬고 있었다. 문학의 역사가 도시에 살아 있으니 제임스 조이스 센터를 찾는 건 관광객의 몫일지도 모른다.


더블린 작가들의 흔적을 보다보니 한국 현실이 떠올랐다. 역사상 최초로 국립한국문학관을 짓고 있지만 부지 선정부터 자료 수집까지 쉬운 일이 없다. 식민지배와 전쟁을 겪으면서 자료는 소실되거나 흩어졌고, 친일 논란과 이념 갈등 속에 문학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흩어진 조각들을 모아 무에서 유를 빚어내야 하는 것이 한국문학관이 직면한 현실인지 모른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더블린 작가 박물관에서 준비 중인 여성 작가들의 전시였다. 남성 중심의 문학사 속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작가들을 재조명하는 전시였다. 더블린의 문학적 전통은 갱신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와의 접점 속에서 끝없이 갱신되는 것이 문학이라면, 한국문학관의 마주한 현실도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다. 문학은 문학관 안에만 있지 않은 법이니까.


<이영경 | 문화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