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중독자의 야간비행]류샤오보가 원했던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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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중독자의 야간비행]류샤오보가 원했던 중국

1989년 6월4일 새벽. 톈안먼광장에서는 학생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시위가 한창이었다. 군부는 총기와 전차를 앞세우고 시위군중에 접근한다. 고르바초프의 방문 시기에 유혈참극이 중국 한복판에서 벌어진다. 이어 중국 정권의 만행을 고발하는 세계 언론의 포화가 쏟아진다. 당시 동유럽발 개혁·개방정책에 영향을 받은 중국은 정치·경제의 내홍을 겪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지옥도가 펼쳐지는 고국으로 복귀하는 인물이 있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중국문화 강연을 하던 류샤오보였다. 1955년생인 그는 노르웨이, 하와이, 뉴욕 등에 이르는 순방길에 있었다. 처음으로 접한 국외 문명의 파고에서 류샤오보는 전통적인 중국의 비판이론이 진부한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지식체계가 보잘것없음을 토로한다. 


중국 근대사에 관한 신선하고도 도발적인 해석으로 신지식인의 대열에 합류한 젊은 비평가는 톈안먼사태를 통해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거듭난다. 시위대 대표로 협상무대에 오른 류샤오보는 인권의 상징으로 떠오른다. 류샤오보는 1988년 6월에 개최한 박사논문 발표회를 기점으로 두 가지 이미지를 장착한다. 정치적 요주의 인물이라는 족쇄와 중국의 미래를 책임질 지성이라는 표식이었다. 


그는 중국은 300년 동안 식민지가 되어야 비로소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폭탄발언을 쏟아낸다. 중국 공안은 본격적으로 류샤오보 주의령을 내린다. 감시 대상에서 제거 대상에 오른 지식청년의 일상은 순탄치 않았다. 치기어린 학자에서 냉철한 운동가의 역할을 받아들인 30대 류샤오보와 그를 추종하는 대학운동권은 연좌, 단식, 구호만으로 권력의 벽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톈안먼사태가 발발하자 류샤오보는 지지세력에게 의미심장한 예언을 한다. 72시간이 지나면 국제관례에 의거하여 정부에서 새로운 협상안을 내놓을 것이라는 발언이었다. 시위대를 향한 정권의 폭압은 류샤오보의 희망과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간다. 1989년 6월6일 저녁이었다. 귀갓길에 오른 류샤오보는 공안에 의해 연행된다. 국내외 여론이 부담스러웠던 중국 정부는 6월24일에서야 그를 체포했다고 발표한다.  


경제개방과 독재정치를 동시에 이뤄야 하는 독재자는 류샤오보라는 작은 거인 앞에서 장고를 거듭한다. 대부분의 부패정권은 폭정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반혁명 선동죄라는 족쇄와 함께 대학강단에서 물러난 류샤오보의 행보는 억압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감금과 억류를 반복하던 반정부인사는 2009년 국가전복선동죄라는 명목으로 징역 11년을 선고받는다. 이듬해 류샤오보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다. 전 세계에 중국 정부를 향한 성찰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여전히 중국은 반성하지 않았다. 시상식 참석을 막기 위해 중국은 류샤오보의 가족을 가택연금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보려는 단속국가의 자화상이었다. 부패한 정부, 시민 탄압, 소득격차의 심화라는 삼중고에 빠진 마오쩌둥의 나라는 패착을 거듭한다. 


류샤오보는 2017년 6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2020년 출옥을 앞둔 상황에서 벌어진 지식청년의 때 이른 죽음이었다. 만약 그가 넬슨 만델라처럼 복역을 마치고 세상에 나왔다면 민주화의 시간을 앞당겼을 것이다. 국경없는기자회(RSF)가 발표한 ‘2019 세계 언론자유지수’에서 중국은 177위에 머물렀다. ‘죽의 장막’의 나라는 러시아와 함께 장기집권의 길을 걷고 있다. 2019년 6월, 중국의 탄압에 항거하는 홍콩에서는 ‘님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퍼진다.


작가 쉬즈위안은 책 <독재의 유혹>에서 버나드 쇼의 말을 빌려 류샤오보를 묘사한다. “정상인들은 세계에 적응하며 살지만 광인은 항상 세계를 자신에게 적응시킨다. 역사의 개혁을 추진하는 사람은 모두가 광인이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취향의 발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