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시작된 서울시향의 현대음악 시리즈 ‘아르스 노바’가 이번 시즌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뭐든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지만 13년간 일궈온 서울시향의 핵심 콘텐츠가 없어지는 건 아쉬운 일이다.
‘새로운 예술’을 뜻하는 ‘아르스 노바’는 서울시향 상임작곡가였던 진은숙이 만든 프로그램. 2005년 재단법인으로 재출범한 서울시향이 국내 최초로 상임작곡가 제도를 도입해 세계무대에서 활약 중이던 진은숙을 불러왔을 때, 20년 만에 고국에서 활동하게 된 작곡가는 자신의 작품 연주보다는 뭔가 한국 음악계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여겼다. 현대음악 연주회와 마스터클래스로 진행되는 ‘아르스 노바’는 그렇게 탄생했다.
매년 네 차례 연주회에서는 이미 고전이 된 20세기 초기작에서 21세기 최신작에 이르기까지 국내에서 널리 연주되지 않던 작품들이 흥미로운 주제로 엮여 폭넓게 소개되었다. 잘 짜인 프로그램과 완성도 높은 연주는 낯선 음악도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음을 보여줬다. 엄선된 250여 곡목 덕에 고전음악이 어떤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차세대 작곡가를 위한 마스터클래스는 작곡 전공 학생들에게 더없이 유익한 장이었다. 상임작곡가의 무료 작곡 레슨은 물론이고 초청음악가의 세미나와 강연을 듣고, 오케스트라 리허설에서 직접 쓴 작품을 시연해보는 경험은 국내에선 흔치 않은 실질적인 배움이었기 때문이다. 역량 있는 학생들에게는 작품 위촉과 발표 기회도 주어졌고, 유학 없이도 외국 무대에 설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시도가 순탄하게 진행되었던 건 아니다.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저항에 부딪히기 일쑤다. 익숙지 않은 난해한 곡들을 연습해야 하는 단원들에게 ‘아르스 노바’ 연주회는 쉽지 않은 과제였다. 시 예산을 받는 공공예술기관에 당장의 수익이나 가시적 성과보다 미래를 위한 장기 투자임을 설득하는 일도 간단치 않았다. 현실적 조건 때문에 혹은 기존의 불합리한 관행 때문에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진은숙은 단단한 의지와 뚜렷한 비전으로 ‘아르스 노바’를 이끌어왔다.
그렇게 5년을 버텨낸 후에야 비로소 진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프로그램의 완성도와 질 높은 연주가 입소문을 타며 고정 관객층이 늘었고, 마스터클래스 출신 젊은 작곡가들도 국내외에서 주목받으며 두각을 드러냈다.
‘아르스 노바’는 서울시향의 국제적 경쟁력을 키우는 바탕이기도 했다. 고전 레퍼토리에 더해 난해한 현대 곡들을 소화하며 음악적 역량이 크게 성장했을 뿐 아니라 진취적인 현대음악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미래의 비전을 가진 단체로 국제 음악계에 각인되었다.
국내 음악계의 변화도 추동했다. 클래식 음악 공연에 현대 곡 레퍼토리가 늘고 있음은 여러 단체들이 좋은 콘텐츠로 양질의 연주를 이어온 덕분이지만 ‘아르스 노바’가 그 견인차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평소 현대음악을 많이 연주함에도 유독 내한 공연에서는 고전 레퍼토리에 머물던 외국 악단들도 최근 생소한 현대 곡을 프로그램에 포함시키곤 한다. 무엇보다 서울시향의 공연 곳곳에 새로운 레퍼토리가 포진해 있다.
13년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서울시향의 모습도, 한국 음악계의 흐름도 달라졌다. 수년간의 온갖 우여곡절 끝에 올해 초 상임작곡가가 사임했고, ‘아르스 노바’는 예정된 두 번의 음악회만을 남겨놓고 있다. 누군가에겐 수익도 못 내는 무가치한 사업이었을지 모르나, 21세기 한국 음악사에서 이만큼 유의미한 활동이 있었을까 싶다. 차세대 작곡가 육성과 현대음악 저변 확대라는 가시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한국 음악계의 오랜 관행과 익숙함에 맞서 새로운 길을 열어간 시도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비록 13년 만에 끝난 도전이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았던 진은숙과 최상의 공연을 위해 애쓴 서울시향 구성원들, 마스터클래스로 성장한 젊은 작곡가들, 매 시즌 음악회를 찾은 수많은 청중이 함께 나눴던 경험은 쉬이 잊히지 않을 것이다.
<이희경 음악학자 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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