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의 소설은 영화계에서 인기가 많다. <내 심장을 쏴라>와 <7년의 밤>은 이미 영화화돼 개봉했고, <28>과 <종의 기원> 역시 판권이 팔렸다. 특히 정유정의 대표작인 <7년의 밤>은 다수의 영화사가 경쟁한 끝에 1억원대 판권료에 러닝 개런티까지 붙는 기록을 남겼다. 강렬한 캐릭터와 굴곡 있는 서사, 극적인 감정 묘사는 한국영화 관계자들이 끌릴 만한 요소다.
책이 아무리 많이 팔린다 해도, 영화 관객 수에는 대체로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정유정은 더 넓은 시장인 영화를 의식하고 글을 쓸까. 정유정은 단호히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독자를 새로운 세계로 끌어들인 후, 실제에선 경험하기 힘든 일을 실제처럼 겪게 함으로써,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어 안전한 현실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주목적”이라고 밝힌다. 자신의 소설이 영화처럼 ‘시각적’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한다. 카메라는 화면의 이면을 포착하지 못하지만, 소설은 별다른 장치 없이도 할 수 있다. 소설가는 다정하게 웃는 남자의 머릿속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그의 머릿속으로 곧바로 들어갈 수 있다. 정유정은 “‘영화화’는 내가 소설로 얻는 여러 결과 중 하나”라고 말한다(정유정·지승호,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영화 <7년의 밤> 스틸 이미지
정유정은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소셜미디어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직 규칙적으로 글쓰고, 운동하고, 다시 글을 쓸 뿐이다. 글을 쓸 때 글 바깥세상에 눈감는 것은 정유정만이 아니라 여러 작가와 시인의 태도다. 김민정은 시인인 동시에 편집자다. 편집자로서는 한 권의 책이 세상과 만나는 접점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하다. 책 제목 속 어떤 단어가 독자들을 자극할지, 시를 어떻게 묶어야 독자들의 호흡이 가빠지지 않을지 생각한다. 하지만 시를 쓸 때는 다르다. “시는 철저히 자기 자신과의 대화일 뿐입니다. 독자의 나이, 성별을 고려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엇나가요. 대중, 독자는 눈에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거든요. 내가 뿌리를 내고 흙을 덮으면, 거기 누군가 옵니다. 내가 흔들리면 누구의 그늘도 될 수 없어요.”(기자와의 통화)
최초의 독자는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조차 만족시키지 못한 글이 다른 누군가를 만족시킬 리 없다. 작가들은 그렇게 자기 내면을 훑으며 글을 쓴다. 어디에 있는지, 누구인지도 모를 독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을 밀고 나간다.
하지만 ‘책’은 다르다. 글이 완성된 상품으로서의 책이 된 이상, 그것은 작가의 손을 떠나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 지난 24일 막을 내린 2018 서울국제도서전은 책과 독자가 만나는 다양한 지점을 보여준 자리였다. ‘성인 10명 중 6명은 1년에 1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지만, 이번 행사는 책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매력적인 물질임을 보여줬다.
2018 서울국제도서전에 마련된 ‘여름, 첫 책’ 코너에서 관람객들이 피크닉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제공
정지혜 사적인 서점 대표의 ‘독서 클리닉’ 앞에는 줄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1인당 10분 정도의 ‘상담’을 하기 때문에 1~2시간 기다리는 건 예사인데도 그랬다. 독서 클리닉은 독자가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면, 상담자가 그에 맞는 책을 추천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도서전이 열린 5일 동안 정지혜는 250명가량의 독자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책을 ‘처방’했다. 고민은 비슷했다고 한다. 각기 다른 독자들이 ‘사는 게 재미없다’ ‘취업이 안돼 힘들다’ 같은 비슷한 고민을 내놓았고, 정지혜는 미리 골라놓은 33종의 책 중 그들에게 맞는 것들을 추천했다. 정지혜가 한 일이라곤 독자의 말을 한참 듣고는 “참 힘드셨겠어요”라고 한 뒤, 고민에 도움이 되는 책 구절을 읽어주고 추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눈물을 흘리거나,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는 독자가 적지 않았다. 책 추천은 어느덧 가벼운 심리상담의 기능도 수행한 것이다.
도서전이 열리는 기간 내내 책 좀 읽는다는 페이스북 사용자들의 담벼락에는 북스피어 부스에서 찍은 사진이 줄줄이 올라왔다. 북스피어는 제주도의 꽃집 ‘디어 마이 블루’와 협업해 부스를 드라이플라워와 다육식물로 꾸몄다. 방문자들은 머리에 화관을 쓰고 찍은 사진을 저마다의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마음산책 부스 역시 각종 식물과 원목 가구 인테리어로 장식돼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책은 몇 장의 종이로 구성된 물건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독자와 만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해졌다. 출판사들이 책을 사면 주는 기념품이 독자를 끌어모으는 경우도 많다. 본말이 전도됐다는 비판도 있긴 하지만, 책과 사람이 만나는 접점이 넓어질 수 있다면 좀 더 기발하고 다양한 방법도 쓸 만하다. 책은 “우리가 경험한 적이 없는 삶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 적극적으로 살아보게 하는 모험적 도구”(정유정)이자, 인류 지혜의 집적이며, 내일을 준비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번 도서전의 주제였던 ‘확장’은 그래서 적절했다.
<백승찬 토요판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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