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 배제의 원리만 존재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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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배제의 원리만 존재하는 사회

지금의 청년세대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는 ‘경제적 인간 되기’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온전한 주체는 경제적인 독립이 가능한 인간이며, 이것이 가능하려면 경제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패보다는 성공을 하고, 경쟁구조에서 우위에 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한 자기관리는 필수조건이다. 이렇게 청년세대들은 경제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열심히 달려왔다. 하지만 그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학자금 대출로 인한 빚과 아르바이트 일자리뿐이다.

졸업을 연기하면서까지 취업을 준비하는 일명 ‘취준생’은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취준생인 ‘내’가 지원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금수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소수에게만 취업이 가능하다’는 자조적인 글도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성공한 멘토의 삶을 따르고, 현실의 자유와 욕망을 억누르며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달려왔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 7>에서도 지원자들은 대부분 ‘무직이거나 아르바이트생’이다. 그 어떤 시즌보다 경제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준비 중’인 젊은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렇듯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공공기관의 임금피크제 연내 도입이라는 대안을 내놓기에 이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방법이 청년실업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이렇게 본질적 문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게 되면서, 청년세대는 스스로를 비하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무차별적인 타인에 대한 비난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노인충, 맘충, 토익충, 진지충’ 등 그 대상은 폭넓고 비난의 강도는 심하다. 청년세대에 대한 우울한 담론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잉여세대’의 등장이 이에 해당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음을 일찍 깨달은 청년들은 스스로를 ‘잉여세대’라 불렀다.

청년세대가 이렇게 심각한 비관적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기성세대들은 청년 시절의 고통과 힘듦은 당연히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오늘날의 청년들을 일컬어 ‘88만원 세대’라 명명하고, 사회구조의 고용문제를 고발하고 청년세대의 고충을 대변하는 담론도 형성되었지만, 여전히 청년세대는 기성세대의 분석 대상일 뿐이다. 문제 해결을 위한 뚜렷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지금 청년세대는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보다 자신과 타인을 비난하거나 비하하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 잉여세대에서 시작된 우울증은 사회가 나를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헬조선’까지 등장하게 만들었다.



최근 개봉한 영화들도 우리 사회의 무의식적 불안감과 현실적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주인공 ‘수남’은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한다. ‘돈을 번다는 것’만이 그녀가 삶을 살아가는 이유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공장에 취직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준비한 수많은 자격증은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모두 무용지물이 된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면서 해피엔딩이 되는 듯했지만, 남편은 사고로 손을 다치고 자살을 시도했다가 결국 식물인간이 된다. 모든 걸 내집 마련 후로 미뤘던 부부의 삶은 점차 일그러진다. 남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던 재개발도 삐걱거리고, 그녀는 결국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사람들을 제거하는 극단적 선택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돈을 벌기 위해 익혔던 아르바이트 기술은 살인무기가 된다.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_경향DB



영화 <메이즈 러너>에서도 지배세력과 청년세대의 대립이 이야기의 주요 축을 이루는데, 특히 주목해야 하는 장면은 젊은이들이 왜 갇혀 있는가, 왜 희생되는가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선택된 사람들로 분류된 젊은이들은 사실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끌려가고, 치료제를 만들기 위한 희생양이 된다. 치료제는 ‘위키드’라 명명된 지배세력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영화 속 세계와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 면에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실에 대해 우울한 진단을 내린다. 지금의 사회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처럼 ‘배제’의 작동원리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을 골라내 거기서 쫓아내고, 그들에게 어울리는 곳으로 추방하거나 아예 처음부터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한다고 비판한다. 영화 속 성실함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수남이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타인과의 연대가 아닌 ‘제거’였고, 지배세력에게 억울한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 젊은이들이 선택한 방법은 ‘연대’였다. 과연 우리 사회의 청년들은 ‘제거’와 ‘연대’ 중 어떠한 방법을 선택할 것인가. 청년세대를 위해 구체적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이 사회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청년들은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이종임 | 고려대 미디어학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