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라는 단어가 대중문화의 키워드로 돌출한 때는 지난봄이었다. 작년 12월엔 고작 112건의 기사에 등장했던 이 단어가 올해 1월에는 244건으로 늘더니 5월에는 1000건을, 7월에는 2000건을 넘었다. 4월부터 “아재 전성시대가 왔다”는 식의 기사가 등장했는데, 이들 기사가 친절하게 설명해준 ‘아재’의 정의는 ‘말이 통하는’ ‘친근한’ ‘귀여운’ ‘소통하는’ 중년 남성이다. 물론 ‘아저씨의 낮춤말’이라는 사전적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누가 처음 이 용법을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져나갔고, 언론이 전유하여 재확산시켰을 것이다. 예능 프로그램인 <마이 리틀 텔레비전> <냉장고를 부탁해> <삼시세끼> 등이 확성기 노릇을 했고, 최근에 시작했거나 방영 예정인 <뭉쳐야 뜬다> <꽃놀이패> <미운 우리 새끼> <인생술집> <아재목장> 등이 ‘아재 프로’로 분류된다.
한국의 중년 남성들이 2016년에 갑자기 귀여워졌을 리는 없다. 세대 간의 불통이 완화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다. ‘부장님 유머’가 한순간에 질적 도약을 했다는 증거도 없다. 사실 예능 프로그램을 이끄는 사람들도 별로 바뀌지 않았다. 바뀐 게 있다면 시간이 흘러 젊던 진행자들이 모두 중년이 되었다는 정도다. 유재석, 김구라, 신동엽은 물론 김성주, 서장훈도 모두 40대다. 아재 현상은 실체가 있는 것일까?
sbs 미운우리새끼 방송화면
<미운 우리 새끼>의 김건모와 박수홍, 토니안 등의 ‘아재’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싱글 남성이다. 그런데 프로그램 속 엄마들은 여전히 아들들을 결혼 못한 ‘미완성’으로 간주한다. “결혼을 해야 해”라는 말을 반복하고, 어디엔가 존재할 며느리는 “아이를 낳을 정도로 젊어야” 하며 “냉장고를 청소해줄” 사람이어야 한다. 전통적 성관념과 가부장제를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아재라는 리본을 달았다. 두 시즌을 마친 <수컷의 방을 사수하라>의 수구적 남성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화면으로 드러난 그림의 내용은 거의 정반대로 보이지만.
오히려 대한민국의 가장 평균적 중년 남성들을 재현하는 예능 프로그램은 <아는 형님>이다. 강호동과 이수근, 김희철 등은 거침이 없다.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 여성 게스트에게 선정적 농담을 하고, 애교를 요구한다. 폭력을 암시하기도 한다. 공식 홈페이지의 ‘기획 의도’가 전하듯 “인생을 좀 아는 형님들”이 인생 해답을 준다고 하니, 아재의 중요한 덕목이라는 소통과는 거리가 멀다. 최근 방영을 시작한 <뭉쳐야 뜬다>의 콘셉트는 또 어떤가? “대한민국 대표 아재 4인방”이 “아재 안성맞춤 ‘패키지여행’에 도전”한단다. 여행 계획 세우기엔 자신이 없고 항공권 예약조차 골치 아픈, 그래서 ‘본격 수동형 여행’을 떠나는 이들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년의 남성들이다. 특별히 아재랄 이유도 없다.
아재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환상이다. 중년 남성이 대중문화계를 거의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현실을 미화했을 뿐이다. 지금의 중년들은 대부분 경제성장기의 마지막 단물을 맛보았고, 감동적 민주화를 몸으로 경험했으며, 전 지구적 대중문화 수용을 처음 맞이했던 이들이다. 노년층이나 청년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고, 텔레비전 오락의 중요한 소비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급작스러운 아재 열풍은 세대가 아닌 ‘코호트’의 문제이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지속적으로 중심적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들이 노년이 될 즈음에는 ‘할배 문화’가 꽃피울지도 모를 일이다. 여전히 ‘할매’는 배제되어 있을 테고, 아재 문화는 지금의 청년을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다. 젊은이들도 소위 아재 프로들을 즐겨보곤 하지만, 청년들이 짐짓 복고적이 되어 아재 문화에 공감하는 것은 중년 남성들을 이해하기 때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현재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미래가 희망적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주로 좋았던 옛날을 회상하거나 모르는 과거를 신화로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아재를 언급하는 기사는 이제 하루 평균 30건 미만으로 떨어졌다. 현상이 아니라 유행어였다. 언어 아래 잠시 가려졌던 속살은 과거와 다르지 않다. 중년 남성은 여전히 권력을 가지고 있고, 그 권력은 주로 여성이나 청년을 향한다. 대중문화계의 인적 구성도, 거기서 생산해내는 내용들도 그러하다. 이제, 권력이 없는 척하기보다는 권력을 내려놓을 때다. 아재라는 단어 자체가 특정한 성과 나이를 함축한다. 지금 아재보다 더 중요하고 더 필요한 것은 ‘여성’과 ‘청년’이다.
윤태진 |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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