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 | 대중문화평론가 herland@naver.com
청춘드라마 전성시대가 있었다. ‘X(엑스)세대’라는 신인류가 등장한 1990년대 얘기다.
그 시대의 아이콘 ‘트렌디 드라마’는 그 자체로 청춘의 장르였고, 캠퍼스드라마와 청춘시트콤도 큰 인기를 누렸다. 최루가스 대신 세련된 패션과 자유로운 연애가 자리한 낭만 캠퍼스의 풍경에 청춘들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면서도 때론 공감하고 때론 설레곤 했다.
전성기가 마감된 것은 2000년대 들어와서다. 마지막 청춘시트콤 <논스톱> 시리즈의 한 대사는 그 원인을 짐작하게 한다. “장기화된 경기침체로 청년실업이 40만에 육박하는 이때….” 시트콤에서조차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외환위기 이후 그늘진 청년의 현실이 청춘드라마의 위기를 불러온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청춘드라마의 양상은 이전과 달랐다. 캠퍼스드라마와 청춘시트콤이 사라졌고, 낭만적 연애와 성장의 서사가 치열한 욕망과 생존의 서사로 대체되었다는 점이 결정적 변화였다.
서바이벌 내러티브는 청춘드라마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대표 서사가 되었다. 자기계발서가 서점가를 휩쓸고, 서바이벌 쇼가 TV를 장악하며, 미션 수행식 성공기 드라마가 인기를 끈다. 학원물에서조차 <공부의 신> <드림하이>처럼 무한경쟁 서바이벌 플롯이 핵심이 되었다.
SBS 드라마 <패션왕> 제작발표회에서 유아인과 신세경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I 출처:경향DB
110만 실업시대라는, 역사상 가장 혹독한 경쟁시스템을 통과 중인 청춘들의 드라마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청춘의 그늘과 청춘드라마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SBS <패션왕>이다.
이선미, 김기호 작가는 전작 <발리에서 생긴 일>보다 한층 처절해진 생존기와 열패감으로 인한 청춘의 우울을 그린다. 영걸(유아인), 가영(신세경), 재혁(이제훈), 안나(권유리) 네 젊은이가 처한 현실은 부착된 상표에 따라 ‘급’이 구분되는 패션처럼 철저한 위계적 사회다.
짝퉁으로 대표되는 동대문은 패션계의 바닥에 속하며, 고졸에 가난한 영걸과 가영의 현실은 그들이 거주하는 좁고 퀴퀴한 공장이 말해준다.
재혁과 안나의 제이패션은 굴지의 의류기업이나 그들 역시 해외 명품을 선망하는 모방자일 뿐이다.
그 등급사회 안에서 패션은, 1990년대 청춘드라마처럼 꿈의 무대가 아닌 혹독한 서바이벌의 무대가 된다.
은행 대출조차 힘들어 사채를 쓰는 영걸은 돈을 위해 짝퉁 판매와 이중계약도 서슴지 않고, 초라한 스펙 때문에 취업이 어려운 가영은 자신의 디자인이 다른 이름으로 출시되는 하청 계약에 어쩔 수 없이 응한다. 재혁도 경영후계자로서 실적 압박에 시달리고, 안나 역시 명품 디자이너가 되었지만 재능의 한계 때문에 불안을 느낀다.
꿈과 성장 대신 경쟁과 서바이벌의 서사가 자리한 작품에서 청춘을 지배하는 감정은 “네가 가진 것을 빼앗아서라도 너를 이기고 싶다”는 욕망이다. 이 때문에 <패션왕>의 멜로도 서로를 이용하고 떠보며 집착하는 복잡한 관계의 사슬을 그린다. 사랑과 야망, 꿈이 자리해야 할 곳에 욕망과 질투, 경쟁만이 일렁인다.
청춘들의 달라진 현실을 비추는 <패션왕>은 역설적이게 어떤 청춘도 위로하지 못한다. 우울한 현실에 대한 현상만 있을 뿐 어떤 전망도 없기 때문이다.
청춘드라마 전성기의 수작 <카이스트>(1999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1995년 여름에 쓴다. 나 정만수는 10년 후 오늘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말할 것이다. 으하하, 나는 살아남았노라고. 살아남기 위해 나 정만수는 끝까지 웃는다. 왜냐. 최후의 승자는 웃는 자니까.” <카이스트>의 열등생 만수의 생존법과 <패션왕>의 우울한 생존기, 그리고 드라마 <카이스트>와 얼마 전 또 한 청춘을 떠나보낸 카이스트의 괴리, 그 먼 간극 안에 청춘의 현주소가 있다.
지금 청춘의 우울은 꿈과 성장이 사라진 청춘드라마의 위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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