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창조적이라야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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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문화비평]창조적이라야 예술이다

또 표절이다. 이번에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슈퍼스타가 무명 인디밴드의 음악을 베꼈단다. 물론 당사자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문제가 된 곡의 제작에 참여했던 이들이 모두 노래는커녕 밴드의 이름조차 몰랐다고 항변한다. 두 노래가 그렇게 비슷한데도 말이다.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다. 자기도 모르게 어디선가 흘려들었던 선율이 작곡을 할 때 튀어나왔다면 말이다. 그도 아니면 정말 우연히 두 사람이 똑같은 영감을 받아 똑같게 곡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사실이 정말 그렇다면 언론의 뭇매를 맞은 본인은 얼마나 억울할까.





표절 시비에 휘말린 사람들은 예외없이 억울함을 호소한다. 자신이 정말 표절을 하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혹은 자신만 표절을 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일 것이다. 후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표절천국 한국에서 표절을 시비 거는 것 자체가 음모이고 계략이다. 그래서 이들은 오히려 당당하다. 표절을 가려내는 것도 쉽지 않다. 특히 예술에서의 표절 판단은 학문보다 훨씬 더 어렵고 모호하다. 논문 표절이야 연구 역량과 윤리가 부족한 사람들이 범하지만, 예술의 표절은 종종 그 자체가 배움의 과정이며 심지어 예술행위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전도서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예술작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흐도 선배 작곡가들의 작품을 베끼는 것으로 작곡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맘에 드는 작품을 만나면 개작을 하기도 하고, 그것을 주제로 자기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본시 창작은 모방에서 시작하는 법이다. 남의 것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순전한 내 것으로 만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혹시라도 그렇게 하는 데 성공할 수 있겠지만 결말은 대부분 희극적이다. 아무도 이해하기 힘든 난해한 작품이 되기 때문이다. 현대음악처럼 말이다.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음악을 작곡하려면 앞선 사람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음계며 화음을 빌려 써야 한다. 같은 화음을 여러 사람이 차용하다보면 그것이 하나의 스타일이 되고, 다수가 그것을 베꼈으니까 그것이 유행이다. 그렇게 일단 유행이 정해지면 누구라도 그것을 따라야 안전하고 그래야 성공한다. 결국 새로운 도전을 해볼까 하는 창작의지는 사라지고 어떻게 잘 베끼느냐 하는 고민만 남게 된다. 번안곡, 리메이크, 샘플링을 하는 이유도 다 그 때문이다. 이들은 결국 표절의 또 다른 얼굴이다. 단지 차이는 돈을 지불한 것뿐.



‘사계’로 유명한 비발디는 협주곡을 500곡이나 작곡하며 이 장르의 유행을 선도했다. 하지만 사망 직후 그는 빠르게 잊혀졌고, 바그너 같은 당찬 후배로부터 “500곡의 협주곡을 작곡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협주곡을 500번이나 재탕했다”는 모욕적인 말을 듣는 신세가 되었다. 지나치게 유행에 충실했기 때문에 지불한 대가이다. 저작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지만, 요즘이라면 자기 표절이라 비난받았을지도 모른다.



국가가 가난하던 시절, 우리는 앞서간 나라들을 베껴야 그들처럼 잘살 수 있다고 믿었다. 산업 역군들의 성공 스토리에서 빠지지 않는 얘기가, 선진국의 기술을 얼마나 고생해서 알아냈는지에 대한 무용담이다. 그렇게 기술도 제도도 문화도 베끼며 성장했다. 자꾸 베끼다보니, 베끼는 것이 습관이 되고 특기가 되어 표절천국이란 오명을 얻었다. 베끼는 것을 잘한 대신 독창성이나 창조적 에너지는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서 더 이상 베낄 수 있는 나라도 별로 없는데 말이다.




‘강남 스타일’은 먹히는데 ‘젠틀맨’으로는 안되는 이유, 너무나 분명하지 않은가. 한 번은 모르지만 두 번은 안 통하는 것이 예술이다. 단순히 저작권을 위배했느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다. 새로움을 위한 고뇌 없이 예술이 설 자리는 없다. 창조적이라야 예술이다. 예술조차 창조적이지 않은 곳에서 누가 창조경제를 말할 수 있을까.





민은기 | 서울대 교수·음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