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목소리로]불신자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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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낮은 목소리로]불신자의 믿음

어찌 알밋알밋 처세를 했던지 겉대중하는 이들 중 기독교 신자들은 내가 기독교 신자인 줄 알고, 불교 신자들은 나를 불교 신자로 안다. 신학대학에서 강연도 하고 불교 잡지에 글도 쓰다 보니 그런가 보다. 종교는 정치만큼이나, 어쩌면 정치보다 훨씬 더 건드렸다 입천장이나 데일 뜨거운 감자이지만, 기실 내가 종교에 대해 취하는 자세는 논어의 말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자왈 경귀신이원지(敬鬼神而遠之)일지니, 공경하되 멀리하겠다는 것이다.


한 술 더 떠 아들아이와 함께 지은 우리 집 가훈은 ‘의심하라!’이다. 진로탐색을 위한 강연을 듣고 온 아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길, 자기는 아무래도 멘토나 롤모델을 만들지 못하겠단다. 바깥으로 드러난 빛나는 성취, 열거되는 업적, 대중의 찬사가 존경과 열광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저것이 진짜일까?’ 하는 의심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옛말이 그르지 않다. 콩 심은 데 콩 난다. 콩 심은 데 팥이 나면 원래부터 콩이 아니라 팥이었을 것이다! 평소 한국사회의 멘토 열풍, 롤모델 유행을 삐딱하게 바라보던 나는 아이의 ‘의심’을 질책하는 대신 무한 격려했다. 의심이야말로 현실주의의 밑바탕이자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키우는 힘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알고 보면 꽤 확신이 강한 불신자인 나는 일상적으로 주위를 경계하는 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크게 기대하지 않기에 실망할 일도 적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냉소가 무색해지는 순간이 온다. 며칠 전 서울에 볼일을 보러 나갔다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1호선 독산역에서 한 청년이 승차하면서 차량 안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지금 며, 몇 시…?”


자기 손에 꼭 쥔 휴대폰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던 청년이 주변 사람들에게 다가가 일일이 시간을 확인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 세 시 삼십사 분…!”


두어 명의 휴대폰 시각이 자기와 같은 것을 확인하고도 청년은 기어이 다른 사람들의 것에까지 손을 뻗쳤다. 덩치는 멀쩡한 청년이지만 그의 마음에는 지금이 몇시이고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어 불안해하는 작은 소년이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막무가내로 한참 통화 중인 사람과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의 것까지 살피고자 했다. 통화를 끊긴 사람, 막 게임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던 사람이 그에게 휴대폰을 뺏긴 채 황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얼른 고대의 유물과도 같은 구형 폴더폰을 열어 그에게 시간을 확인시켜 주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화면을 들여다보던 청년이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명학역까지… 몇 정거장?”


“세 정거장 남았네요.”


“기다려요?”


“네, 기다려요.” 


그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깃든 것도 잠시, 열차가 정거하고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자 그는 다시 사람들을 붙잡고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지금 몇…시? 명학역…두 정거장?”


“세 시 삼십육 분. 두 정거장 남았네요.”


“기다려요?”


“기다려요.”


(경향DB)


청년의 상태를 눈치챈 사람들은 시간과 남은 정거장 수를 거듭 확인하고서야 안심하는 그를 위해 몇 번이고 같은 행동과 말을 되풀이했다. 마침내 도착지에 닿아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릴 때까지. 불균형한 걸음걸이로 사람들의 숲으로 스며든 그의 뒷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장애가 있는 아들을 홀로 세상에 내보내며 청년의 엄마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불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선의를 믿고, 누군가는 엄마를 대신해 시간과 정거장을 가르쳐줄 것이라고 믿고 아들의 등을 떠밀어 세상 밖으로 내보냈을 것이다.


엄마가 되면 걱정이 많아진다. 아이 홀로 이 험한 세상을 어찌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염려하다 보니 누군가는 ‘헬리콥터 맘’이 되어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쫓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엄마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세상 속에서 우뚝하게 홀로서기를 응원한다. 내가 지하철에서 만난 장애인 청년의 엄마도, 학교에서 진행하는 캠프라니 응당 안전하고 교육적이리라 믿고 아이를 보낸 공주사대부고의 엄마들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내려야 할 역에서 무사히 내린 청년과 달리 서해의 물결 속으로 들어간 아이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믿음은 강요할 수 없다. 사회에 대한 신뢰는 원인과 결과가 일치하고, 진행 과정이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때에 생긴다. 그리고 그 모두의 밑바탕에는 선한 의지가 깔려있어야 마땅하다. 또다시 배반당하고 거듭 우롱당할지라도, 그런 믿음 없이는 아이들을 키우고 꿈을 꿀 수 없다. 불신자인 나조차도 간절히 믿고 싶다. 그래도, 그래도 아직은 지금이 몇시이고 여기가 어딘가를 아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남아있어 주리라고.



(경향DB)




김별아 |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