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미생>은 윤태호 작가의 동명 웹툰을 드라마로 옮긴 작품이다. 한국기원 연구생이던 장그래(임시완)가 프로 입단에 실패한 뒤 후원자의 소개로 대기업에 들어가 겪는 좌충우돌 성장담을 그린다. 십대의 대부분을 바둑으로 보낸 탓에 고등학교 졸업 자격도 검정고시를 통해 취득한 소위 ‘무스펙’자가 바둑판 위보다 엄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남고자 애쓰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고 때로는 눈물겹게 펼쳐진다.
드라마에서는 간략하게 넘어갔으나 원작에 상세히 언급된 장그래의 과거 중에는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그가 기원에 들어가게 된 계기다. 당시 부친의 회사는 부도 상태였고 그 와중에 그래에게 붙여진 바둑 ‘영재’라는 말은 가계를 되살릴 희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가 기원에 입성하면서 그의 부모도 동시에 이창호, 이세돌의 세계 랭킹과 상금 액수 기사를 스크랩하기 시작했다고 원작은 말한다. 입성 시기 그래의 나이를 고려해보면, 때는 1997년 외환위기 직후였다.
즉 장그래의 인생 항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배경에는 외환위기의 그늘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가 결국 바둑의 세계에서 살아남지 못한 이유는 순수하게 바둑을 좋아했던 꼬마의 어깨 위에 성공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강박의 무게가 얹힌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장그래가 존경하는 조치훈 9단이 이야기한 “바둑 한 판 이기고 지는 거, 그래봤자 세상에 아무 영향 없는 바둑, 그래도 바둑, 세상과 상관없이 그래도 나에겐 전부인 바둑”의 철학은 애초에 그래의 현실에서는 적용 불가능한 것이었다.
장그래의 인생 제2막인 종합상사 생존기 역시 이러한 시대적 배경의 연장선상에 있다. 1970년대 경제성장기 주역이던 종합상사는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대기업들이 수출 업무를 자체적으로 해결하면서 그 위상이 축소된 대표 업종이다. <미생>의 종합상사는 한층 강화된 서바이벌 게임의 축소판으로 그려진다. 상대를 견제하고 자기가 돋보여야 하는 인턴들의 입사 프레젠테이션 에피소드나, 계약 상대로 재회한 고교시절 친구로부터 ‘갑’의 횡포를 겪는 오상식 과장(이성민)의 에피소드가 대표적이다.
tvN 드라마 <미생> (출처 : 경향DB)
<미생>이 빛나는 것은 바로 이 근본적 문제의식에서부터 이야기를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우리 시대의 모든 가치를 성과주의 아래 복속시키고, 모든 관계를 경쟁적·적대적으로 재편한 외환위기 이후의 폐해를 가장 냉혹한 서바이벌 체제의 한복판에서 반성적으로 되돌아본다. 장그래의 이야기가 ‘실패자’의 입장에서 시작되는 것도 그래서다. 그는 이미 한번 실패했지만 바둑의 ‘복기’가 은유하는 반성적 성찰을 통해 또 다른 도전을 하게 된다. 이 ‘실패 이후의 반성적 서사’는 파국의 징후가 여기저기에서 드러나는 현재의 우리 사회에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더 나아가 <미생>은 반성적 성찰을 통해 생존게임의 폐해가 뒷전으로 밀어낸 중요한 두 가지 가치를 이야기한다. 하나는 장그래 어린 시절의 바둑처럼 물질적 성과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일의 의미”와 즐거움이고, 또 하나는 타인을 존중하는 공동체적 관계의 중요성이다. 이는 영업3팀을 통해 잘 드러난다. 실적이 중요한 회사에서 팀장 오상식이 이끄는 3팀은 쉽고 성과가 분명해 보이는 일보다 “피를 끓게” 만드는 도전을 더 즐긴다. 업무에 혼신의 힘으로 매달리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성과사회 노예로서의 면모가 아니라, “상사맨”이라는 호칭처럼 로망스 시대 모험담의 낭만이 느껴진다. 자아성취가 불가능해진 오늘의 노동 현장이 상실한 가치다.
이들이 보여주는 타인 존중과 연대의 윤리 역시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조건과 성과로 사람들을 줄 세우는 사회와 달리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는 장그래 특유의 존중의 윤리는 이미 팀장인 오 과장이 장그래를 통해 미처 몰랐던 사실을 배우는 데서 잘 나타난다. 서로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며 경쟁보다 동료를 위하는 영업3팀은 <미생>이 추구하는 가치가 체화된 공동체다. 이상적이지만 결코 판타지는 아니다. 한국 사회가 넘어진 바로 그 자리에서 반성을 통해 다시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김선영 | 드라마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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