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멘붕 시대와 생고생 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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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문화비평]멘붕 시대와 생고생 예능

올해 상반기 예능 프로그램을 결산할 때 빠지지 않았던 키워드 중 하나가 ‘고생’이다.

 

MBC <일밤- 아빠! 어디가?>의 서툰 육아일기에서부터 SBS <정글의 법칙>의 오지체험까지, 고생의 범위도 드넓다. 최근에는 여기에 ‘생’이라는 접두사가 덧붙여졌다. 그야말로 ‘생고생’ 예능의 범람이다. 이때 ‘생고생’은 ‘공연한 고생’이라는 본래 의미보다 ‘혹독한 고생’의 뜻에 더 가깝다. ‘생지옥’의 사례처럼 고생의 강도가 더해진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능의 고생담은 갈수록 독해지고 있다. ‘생고생 버라이어티’를 표방했던 SBS <맨발의 친구들>이나 ‘고생의 끝판왕’을 자처했던 MBC <파이널 어드벤처>처럼 기획의도에서부터 대놓고 혹독한 고생담을 내세운 프로그램들이 속속 등장했다. <일밤- 진짜 사나이>가 군인들과 똑같은 군사훈련을 받는 연예인 이야기를 내놓자, SBS <심장이 뛴다>에서는 위험천만한 화재진압 현장으로 연예인을 투입하는 소방 체험기가 펼쳐졌다. 급기야는 tvN <시간탐험대 렛츠고>의 조선시대 노비 체험까지, 고생은 점점 극한으로 치닫는다.

 

 

SBS <정글의 법칙> (경향DB)

 

 

물론 고생하는 연예인을 예능의 소재로 삼는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허술하고 망가지는 예능인의 모습은 언제나 코미디의 주 요소였다. 그러나 고생을 일회적 소재로 삼는 데 그쳤던 과거와 달리, 요즘 예능 속의 고생은 서사의 형태로 진화하면서 강력한 콘텐츠로 급부상했다. 특히나 최근의 생고생 예능은 모두 유사한 서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날로 심해지는 고생의 강도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최근 생고생 예능들은 공통적으로 초반부터 극한상황에 처한 출연자들의 ‘멘붕’을 강조한다. <맨발의 친구들> 첫 회가 이국의 사막 한가운데 떨어진 멤버들의 다급한 질문에서 시작되는 것은 그 단적인 사례다. 그들은 외친다. “여기가 어디야? 사막에 우리가 왜 와 있는 겁니까?” 바야흐로 기나긴 고생담의 서막이다. <진짜 사나이>는 평균연령 30대 후반에 재입대한 멤버들이 상관과의 첫 대면 순간부터 ‘멘붕’에 빠지는 모습에서 이야기를 출발하고, <심장이 뛴다>는 생지옥 같은 화재 현장 앞에서 공포와 불안에 질린 출연자들의 모습과 ‘신의 가호’를 비는 자막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고생담은 자연스럽게 붕괴된 정신의 재건기로 이어진다. 이들 프로그램이 한결같이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 같은 표현을 공유하며 정신력 강화를 강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각 프로그램은 그 정체성을 다양한 수식어를 동반한 ‘정신’으로 규정한다. 생고생 예능 열풍의 도화선이 된 <정글의 법칙>은 ‘야생 정신’, <맨발의 친구들>은 아무것도 없이 맨땅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의미의 ‘맨발 정신’, <진짜 사나이>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군인 정신’이 곧 프로그램의 대강령이 된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 수 있다는, 이른바 ‘멘붕’ 시대의 임시 처방전과도 같다.

 

 

SBS <맨발의 친구들> (경향DB)

 

당연히 배경이 극한상황일수록 정신력은 더욱 강조된다. 전시 상황을 대비하는 <진짜 사나이>와 생사가 오가는 구조 현장을 다루는 <심장이 뛴다>가 대표적이다. 두 프로그램의 위급한 상황은 그 어떤 프로그램에서보다 더 강한 정신력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들 프로그램에 의하면 한층 강한 정신력이란 개인을 넘어 조직을 위할 때 생기는 것이다. 조직의 질서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단결을 통해 하나된 정신력을 지닐 때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한국의 군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던 <진짜 사나이>의 샘 해밍턴도,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에 반발했던 <심장이 뛴다>의 조동혁도, ‘나 하나 때문에 동료가 희생될 수 있다’는 경고와 ‘나의 인내로 사랑하는 가족과 공동체를 지킨다’는 사명 아래서 결국엔 조직의 충실한 구성원으로 거듭난다. 그들의 변화가 지향하는 서사의 끝에는 ‘진짜 사나이’와 ‘영웅’이라는 조직의 이상형이 서 있다.

 

어딘지 무척 낯이 익다. 개발시대에 고도성장의 주역으로 불렸던, 산업역군들의 헝그리 정신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런 의미에서 생고생 예능은 국가 위기 상황을 강조하며 개인의 자율보다 국민대통합을 중시하는 이 시대의 맞춤형 버라이어티처럼 보인다.

 

 

김선영 |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