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달 초 개봉을 앞둔 <관능의 법칙>은 40대 여성 세 명의 성과 사랑을 그린다. 2003년, 20대 싱글여성들의 욕망과 사랑을 다뤘던 감독의 전작이자 한국형 칙릿 영화의 시초 격이던 <싱글즈> 40대 버전인 셈이다. <싱글즈>가 그 당시 대중문화계를 장악하다시피했던 한국형 칙릿 열풍의 선두주자였다면, 10여년 뒤의 이야기인 <관능의 법칙>은 그 열풍 이후를 말해줄 작품이다.
국내의 칙릿 열풍은 2000년대 초반, 미국 HBO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와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성공적 수입으로부터 시작됐고, 곧 이어 우리 현실에 접목된 한국형 칙릿의 등장을 통해 인기가 지속됐다. 21세기 소비사회를 배경으로 젊은 직장 여성들의 일과 사랑을 그리는 이 장르에서, 주로 ‘골드미스’들을 내세운 외국산 칙릿에 비해, 한국형 칙릿은 대부분 평범한 노처녀들을 등장시키며 공감을 샀다.
MBC <내 이름은 김삼순>(2005)과 <여우야 뭐하니>(2006), tvN <막돼먹은 영애씨>(2007), 훗날 동명의 드라마로 각색되기도 한 <달콤한 나의 도시>(2006), <스타일>(2008) 등의 소설이 대표적이다. 이들 작품 속 여성들은 소박하고 현실적이었지만, 연애의 결론을 결혼과 일치시키지 않고, 자기계발에 힘쓰며, 성과 소비에 대한 속물적 욕망의 금기로부터 자유로웠다는 점에서 새로운 여성형의 등장을 알렸다.
이 솔직하고 꿋꿋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외환위기 이후 심화된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공감을 얻으며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2008년을 기점으로 대중적 관심에서 멀어졌다. 2009년 베스트셀러 칙릿을 원작으로 한 SBS <스타일>, 전작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통해 칙릿 열풍을 주도했던 김인영 작가의 2010년작 MBC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 등이 연이어 실패한 것이 한몫을 했다.
하지만 그보다 결정적인 쇠퇴의 배경에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불황의 장기화로 더욱 악화된 고용 현실이 작용한다. 기본적 생존마저 위태로운 상황에서 칙릿을 비롯한 자기계발서사들은 쇠퇴하고, 극단적인 서바이벌 서사나 힐링의 서사가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이다. 특히 여성들은 남성보다 극심한 고용 불안에 시달리게 됐다. 지난 6년간 남성 비정규직 비율이 감소할 때 여성의 비율이 49%에서 53.6%로 증가했다는 한국노동연구원의 ‘2013년 비정규직 노동시장 특징’ 보고서 항목은 그러한 현실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tvN ‘막돼먹은 영애씨’ (경향DB)
칙릿 전성기인 2007년 첫 방영을 시작해 현재까지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 <막돼먹은 영애씨> 시리즈를 보면, 점점 퇴보하는 여성 삶의 질이 영애(김현숙)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통해 잘 드러난다. 최근 시즌에서 36세가 된 영애는 10년 넘게 다닌 직장이 폐쇄되자 겨우 구한 새 직장에서 평사원으로 강등되고 월급이 깎인 채로 가사도우미에 버금가는 노동까지 짊어진다. 점점 힘겨워지는 그녀의 삶은, 35세를 기점으로 연봉과 직위가 정점에 올랐다가 그 이후부터 점차 하락한다는 한국 직장여성의 평균적 삶을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칙릿 장르 전성기 이후 싱글여성의 삶을 다루는 작품들은 <막돼먹은 영애씨> 후반부 시즌처럼 생존에 급급한 생계형 여성들을 주로 이야기한다. 능력 있는 고소득 싱글여성이면서도 골드미스 서사의 모든 관습을 뒤엎는 캐릭터 미스 김(김혜수)을 내세워 여성 비정규직의 현실을 고발한 KBS 직장생존기 <직장의 신>도 그 일부다.
현재 방영 중인 tvN <식샤를 합시다>나 윤성호 감독의 인터넷 영화 <출출한 여자> 등도 그 일례들이다. 이 작품들은 흥미롭게도 싱글여성들의 먹는 이야기, 일명 ‘먹방’을 소재로 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자기위안으로서의 소비를 즐겼던 칙릿 속 싱글여성들의 문화가, 악화된 현실 속에서 생계라는 코드와 만나 먹는 행위로 축소되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약 10년 전 영화 <싱글즈>의 주인공 나난(장진영)은 30대를 목전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서른 살이 되기 전 인생의 숙제, 둘 중의 하나는 해결할 줄 알았다. 일에 성공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지금 난, 여전히 일에 성공하지 못한 싱글이다. 그러면 어때? 마흔 살쯤에는 뭔가 이루어지겠지 뭐.” 칙릿 열풍 그 이후, 더욱 팍팍해진 삶을 살아가는 싱글여성들에게는 저 질문조차 낭만적으로 들린다. 문득 <관능의 법칙>의 ‘꽃보다 아름다운’ 40대 언니들은 이 질문에 어떻게 응답할지 궁금해진다.
김선영 | 드라마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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