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나라 대통령은 여성이다. 어린 시절 대통령은 항상 남자아이들만의 꿈이었고, 남자가 반장을. 여자가 부반장을 하는 것이라고 배우고 자란 우리 세대에서는 꿈도 꾸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 주변을 보면 여성이 대통령이 된 것이 놀랍지도 않다. 고등학생 아들을 둔 학부모들은 여학생들한테 자기 아들이 치일까봐 남녀공학을 기피한다 하고, 시험으로 선발하는 각종 고시의 상위 합격자는 대부분 여성들이 휩쓸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심지어 할당제를 적용해서라도 일정 비율의 남성을 선발해야 한다는 노골적인 주장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그런데 아직도 여성이 한다고 하면 뭔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분야가 하나 있다. 바로 지휘자이다. 여성 지휘자가 아주 드물기도 하거니와 간혹 여성이 지휘를 하는 모습을 보면 여성인 나도 어쩐지 생경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연미복을 입은 모습도 어색하고, 그렇다고 치마를 입은 모습도 부자연스럽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성의 전유물인 지휘자에 도전하는 여성은 조롱을 당하기 일쑤였다. 뉴욕타임스의 음악평론가 해럴드 숀버그는 “여성 지휘자의 장점은 무대에 서면 언제 음악이 시작되는지 금방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속치마가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이 바로 그 때다”라는 악의적인 농담을 하기도 했다. 지휘자가 손을 높이 들었다가 내리는 것이 음악을 시작하라는 신호인데, 무대 밑에 있던 남자들은 높이 든 여성 지휘자의 손보다, 손을 치켜들면서 올라간 치마 밑을 보고 있었다는 얘기다.
지휘자는 차치하고라도 오케스트라에서 여성이 연주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니다. 요즘 국내 오케스트라의 경우 여성 단원이 남성보다 많지만, 이것은 세계적으로 볼 때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다. 유럽이나 미국 주요 오케스트라 단원의 대다수는 남성이다. 역사가 오래되고 평판이 높은 오케스트라일수록 여성의 비율이 현저히 낮다. 여성 단원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가장 부정적이었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997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여성 하프 연주자를 단원으로 받아들였는데 지금도 여성 단원은 다 합쳐서 네 명뿐이다. 그나마 여성단체의 반발과 오스트리아 의회의 압력이 없었더라면 그보다 더 적었을 것이다. 하기야 18세기까지도 유럽에서는 여성 대신 거세된 남성 성악가인 카스트라토가 여성의 높은 음역을 맡아 노래했으니 음악계에서 여성에 대한 거부감은 생각보다 뿌리가 깊다.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마친 피아니스트 손열음 (출처 :경향DB)
오케스트라는 단순히 연주자들의 집합이 아니다. 오케스트라만큼 긴밀하고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조직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오케스트라는 군대 조직과 유사하다. 지휘자의 지시에 따라 현악기 주자들과 관악기 주자들은 공동의 목표를 위해 달려간다. 단원은 자기가 맡은 부분만을 연주하며, 그 소리는 절대로 튀면 안된다. 단원 개인의 실력이나 연주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그것은 오케스트라 전체가 만들어내는 하모니로 녹아들어야 한다. 오케스트라가 화합의 중요한 상징이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오케스트라는 종종 위계적이고 전체주의적이다. 집단적 효율성, 기능적인 분업,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라는 속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재자들이 장대한 규모의 오케스트라를 좋아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본디 음악이란 것은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소리가 모여서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어울림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카리스마를 가진 제왕적 지휘자라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작위적이며 조화를 거스르는 것이다. 다양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연스러운 공감과 울림을 도와주는 지휘자가 진짜 지휘자다. 그것이 소통이고 하모니다.
새해에는 사회 곳곳에서 소통과 화음을 만들어내는 지휘자들을 많이 보고 싶다. 그가 연미복을 입든 치마를 입든 상관없다. 세상살이에 힘든 우리에게 아름다운 음악만 들려준다면. 음악은 힐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