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은 ‘한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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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 블라블라/노래의 탄생

양희은 ‘한계령’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설악산에 갔을 때 만났던 한계령은 신선이 노닐던 그 어디쯤이었다. 그래서인지 늘 한계령을 넘어설 때마다 가슴이 설렜다. 그 설렘도 산을 가로지르는 긴 터널 때문에 빼앗겼지만 말이다.

 

‘한계령’은 정덕수 시인의 원작 시를 바탕으로 하덕규가 작곡한 노래로 시적 비유가 넘치는 몇 안되는 가요 중 하나다. 이 노래를 부른 양희은은 탁월한 공명을 가진 청아한 목소리로 듣는 이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저 산은 내게 우지 마라, 우지 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하덕규에게 한계령은 어린 시절 추억이 묻어나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한계령 아래 고성군 토성면 천진마을에서 자란 그에게 안개를 두르고 묵묵히 서 있는 산은 친구 같은 존재였다. 열 살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올라온 이후에도 하덕규는 힘들 때마다 한계령을 찾았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올 때면 한계령을 찾았다.

 

추계예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그림을 포기하고 ‘시인과 촌장’을 결성하여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했지만 노래도 그에게 큰 위안이 되지 못했다. 어느 여름날 절박한 심정으로 한계령을 찾았다. 그림도 노래도 안되면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았던’ 그는 한없이 나약했다. 그러나 구름이 낮게 깔려 비를 뿌리는 한계령 어디쯤에서 ‘우지 마라’ 하고 ‘내려가라’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날 한계령은 하덕규에게 ‘나를 더 이상 도피처로 삼지 말라’고 얘기했다.

 

그날 이후 하덕규는 왕성하게 작품을 쓰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날의 느낌으로 쓴 ‘한계령’은 선배인 양희은에게 건넸다. 그러나 양희은의 노래는 발표된 지 5~6년이 지나서야 빛을 봤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뒤늦게 팬들의 사랑을 받는 노래가 된 것이다. 하덕규는 요즘 종교음악 활동을 하면서 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오광수 출판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