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외국 서적을 읽을 일이 생겼다. 사전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실력이기는 하더라도, 더듬더듬 뜻을 헤아려가며 읽는 중이다. 문제는 사전에도 없는 단어를 만나거나, 사전에는 있으되 우리나라에는 없는 단어들을 만날 때이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책에서 퍼블릭 렌딩 라이츠(Public Lending Rights)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처럼.
의사의 오진으로 인해 자신이 곧 실명을 하게 될 거라고 믿게 된 작가가 실명 후 재정상태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이다. 앞으로 책의 인세가 얼마나 들어올지를 셈해보고, 퍼블릭 렌딩 라이츠로 벌어들이게 될 돈은 얼마나 될지를 생각해보다 비참해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잠깐 멈춰 사전을 찾아본 후, 책의 맨 앞으로 돌아가 이 책이 출판된 날짜를 확인해보았다. 1978년에 영국에서 출판된 책이었다. 순간 나는 이 작가보다 훨씬 더 비참해졌는데, 사전에서 ‘공공대출권’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 제도가 우리나라에는 없기 때문이다. 1978년은 물론이고 지금도 여전히.
저작권 기술 용어사전에 의하면, 공공대출권이란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도서나 음반을 공중에게 대출하는 것에 대해 저작권자에게 보상을 해주는 제도를 말한다. 덴마크에서는 1948년부터 시행되었고, 유럽 여러 나라에서 성공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보면서 돈을 내라는 얘기가 아니라 제도적으로 작가에게 보상을 해준다는 얘기다.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독자로서도 안심되는 얘기다. 이런저런 이유로 도서관을 자주 다니기 때문이다. 원고를 쓰러 가기도 하고, 책을 읽으러도 가고, 물론 책을 빌리러도 간다. 빌리는 책의 종수도 꽤 많은 편인데, 이 책을 굳이 사야 할까 싶어서 빌려 보는 경우도 있고, 서가에서 눈에 띄자마자 당장 읽고 싶어서 빌려 보는 경우도 있고, 내 번잡한 책장에서 찾느니 정돈 잘된 도서관에서 찾는 게 더 편해서 빌려 보는 경우도 있다. 욕심껏 빌렸다가 읽지 못하고 반납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잘 읽고, 감동하고, 고마워지는 책들이다. 고마워서 미안해지는 책들이기도 하다. 책을 내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다보니 그 책 내는 일이 얼마나 힘겹고 고단한 일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가 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고 말하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말한다면, 나는 진심을 다해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냐고 대답할 것이다. 읽어주신 것만도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고, 진심에 진심을 더 담아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우리 집에 온 손님이 내가 차린 밥을 맛있게 드셔주시는 게 고마운 일인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손님만 치르고 살 수 있다면 평생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글 쓰는 일은 손님을 치르는 일을 넘어 노동이기도 하다. 어떤 일이나 그런 것처럼, 똑같이.
글 쓰는 사람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이 제도의 도입이 적극 검토되고 있는 중인 모양이다. 물론 이 제도가 시행된다고 해서 작가들의 삶이 당장 나아지지는 않을 것 같다. 도서관에서도 가장 많이 대여되는 책은 가장 많이 팔리는 책들인 경우가 많다. 가난한 작가는 여전히 몹시 가난할 것이다. 그 가난한 작가의 책을 빌리지 않고 도서관에서만 읽는 경우는 어떻게 되나. 참고 삼아 보는 학술서적 같은 경우는 일부만 보게 되기도 하고, 또 몇 줄만 보게 되기도 하는데, 그런 경우는 또 어떻게 되나. 제도 시행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질수록 궁금한 것도 많아진다.
책을 쓰는 일은 읽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아무도 읽지 않을 책을 쓰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작가가 가난한 것은 작가의 책임인가. 어떤 작가도 아무도 읽지 않을 책을 쓰지는 않겠지만, 누구나 읽을 것을 의도하며 책을 쓰지도 않는다. 많은 작가들이 그렇고 나 또한 그렇다. 세상에 필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믿고, 그 이야기가 비록 달콤하거나 유쾌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문학이 문학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믿고, 불편한 진실을 고스란히 불편하게 말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안 팔려도 쓰고, 많이 안 읽힐 줄 알더라도 쓰는 이유다. 더 열심히 쓰는 이유다.
우리나라는 비록 간혹이기는 하더라도, 밀리언 셀러가 나오는 나라다. 비록 한정된 책이라도, 어쨌든 그토록 많은 사람이 책을 읽는다는 뜻이다. 자식이 책을 많이 읽으면 자랑스러워하고, 자신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혹은 못한다는 사실을 못내 아쉬워한다. 누구나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고,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부럽다고 말한다. 내가 도서관을 좋아하는 이유다. 이토록 가까운 곳에 이토록 많은 책이 있는데, 쓱 빌려주고 생색도 안 내는데, 책 빌려 갔다고 독후감 내라고 하지도 않는데, 그야말로 얼마나 좋은가. 그러니 가서 쓱 빌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도서관의 서가를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작가들의 몫이겠다. 공공대출권의 시행이 작가들의 기운을 북돋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것이다. 책 많이 빌려 보는 나는, 훨씬 더 마음이 좋겠다.
<김인숙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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