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에 가장 각광받는 드라마 장르는 단연 정치사극이다. 권력 투쟁의 긴장감과 리더의 자격을 흥미진진하게 그린 이야기는 선거전이 한껏 고양시킨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는다. 탄핵 정국이라는 변수와 무관하게 대선이 예정되어 있던 올해에도 일찌감치 각 방송사가 공들여 준비한 대작 사극들이 막강 라인업을 구축하고 있다. 이미 연초부터 세 편의 사극이 방영된 가운데 제일 눈에 띄는 작품은 MBC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이하 <역적>)이다. 홍길동 이야기를 극화한 이 드라마는 박근혜 정부 시대에 유행한 주요 사극들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으면서도 한층 진화한 화두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인상적이다.
지난 4년간 등장한 사극에서 제일 두드러진 특징은 망국의 정서였다. 역사상 최악의 왕이라는 선조 연간과 임진왜란의 비극을 다룬 작품들이 유독 많았고 뱀파이어, 귀신, 흑주술사 등이 나라를 지배하는 기이한 판타지 사극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그려낸, 무능하거나 사악한 리더 치세하의 절망과 분노는 ‘헬조선’이라는 신조어와 맞물리며 지금 이 시대의 어두운 현실과 정확하게 조우했다. <역적>에 이르러 이 같은 정서는 더욱 뚜렷해진다. 시기적 배경부터가 조선 최악의 폭군인 연산군 시대이며, 주인공은 그 폭정의 짐을 온몸으로 떠받치며 살아야 했던 노비들이다.
드라마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갈등과 긴장의 축을 이루는 홍길동(왼쪽)과 연산군.
익히 알려진 고위관리 가문의 서자 출신이 아니라 천민 출신으로 그려지는 홍길동(윤균상)은 그보다 먼저 “씨종의 아들로 태어나 씨종으로 자란 사내, 천하디 천한 이름 아모개를 받아 아모개로 죽은 사내”인 아비(김상중)의 비극적 운명을 대물림받는다. 아무리 특별한 재주를 지녔어도 ‘개돼지’처럼 엎드려야 살 수 있다는 체제의 모순이 내화된 노비들의 일상은 전쟁과 역병의 창궐로 점철된 기존 사극의 선명한 지옥도보다도 더 뿌리 깊은 절망을 표현한다. ‘헬조선’의 정서가 전복의 분노라기보다 냉소와 체념에 가까운 것임을 생각할 때 <역적>만큼 이를 정확히 반영한 작품도 드물다.
하지만 민중사극으로서 <역적>의 진정한 의의는 이 절망적 현실인식에도 불구하고 민중을 결코 수동적인 피해자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동안 민중사극을 표방하는 많은 작품들이 주인공의 비범함을 강조하면서 민중은 구원을 기다리는 존재로 묘사하는 한계를 반복해왔으나 <역적>은 이를 뛰어넘는다. 예컨대 길동이 아기장수이자 백년 만에 탄생한 역사라는 점은 단순한 영웅주의적 설정과는 다르다. 길동 모친 금옥(신은정)과 아모개의 대화 신에서 날개 뼈를 지니고 태어났다가 갑작스럽게 죽은 이웃집 노비 아들의 일화나 아기장수 못지않은 힘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 힘을 잃은 아모개의 어린 시절 회상은 이것이 특별한 영웅의 서사라기보다 민중의 억눌린 꿈과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말해준다.
더 나아가 <역적>이 써나가는 민중서사는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를 연상시키는 지점이 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평범한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의 화형 사건에서 당시 주류 가치관을 거스르는 독창적 역사관을 발견하고 그 기원에 자리한 민중문화를 추적한 이 책은 잘 알려진 대로 거대담론에 밀려난 주변부 문화의 역동성을 재평가한 미시문화사의 고전이다. <역적> 또한 기존 영웅적 주인공 위주의 사극이 놓쳤던 민중들의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힘에 주목한다. 얼핏 극 초반을 이끌어가는 것은 아모개의 뛰어난 활약처럼 보이지만 더 자세히 들어가 보면 그 이면에는 엄혹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생존전략을 찾고야 마는 민중들의 은근한 저항담론과 낙천적인 유머가 아모개 힘의 원천이었음이 작품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이는 참봉 부인에게 혼나는 아비를 바라보며 “울 아버지가 그러는디 개가 짖을 땐 이밥 먹는 생각 하면 된대”라며 위로하는 어린 노비들의 소소한 대화로 드러나기도 하고, 아모개가 억울한 재판을 당했을 때 함께 목숨을 걸고 증인으로 나서주는 감동적인 연대의 에피소드로 극화되기도 한다.
그러다 초반을 지나면서 점차 민중의 힘으로 부각되는 것은 바로 “듣는 귀”의 힘이다. 아모개가 주막에서 폐비 윤씨와 그 권력의 흐름에 대한 양반들의 대화를 듣고 가족의 목숨을 구한 것처럼 이 ‘듣는 귀’는 훗날 길동이 감히 가까이 가지도 못할 나라님을 이용해 원수를 치는 어엿한 ‘정보전’의 형태로 발전한다. 연산(김지석)이 왕으로서의 권력을 폭력적으로 행사한 첫 사례가 사초와 언로를 통제하는 무오사화였음을 고려하면, 이러한 민중의 정보력은 훗날 거대권력에 맞서는 저항담론으로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될 것임에 분명하다.
<역적>이 기존의 민중사극보다 진화한 지점은 하나 더 있다. 홍길동의 역사는 단지 아버지의 세계를 계승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아모개의 혁명이 ‘노비도 같은 인간’임을 선언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길동의 혁명은 ‘여성 또한 인간’임을 선언하는 지평까지 확대된다. 가령 아모개가 세 자녀 중 장남 길현(심희섭)은 진사나 참봉, 차남 길동은 장수가 되길 원하는 소망을 이야기할 때 막내딸 어리니(정수인)의 꿈은 침묵 속에 남아 있었다. 이는 길동의 세대가 직접 해결해야 할 역사다. 8회에서 길동이 여동생을 닮은 가령(채수빈)에게 부엌일을 만류하며 “여자 혼자면 밥하고 빨래하고 음식상 나르고 그러는 거야? 앞으로 그러지 마. 우리가 먹을 술은 우리가 걸러먹어”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 진화한 역사가 어떤 세상이어야 하는지 명확히 일러준다. 민중사극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가는 <역적>의 행보에 계속해서 주목하게 되는 이유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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