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JTBC 드라마 <밀회>를 보던 때가 떠오른다. 2014년 3월에 시작해 5월에 끝났으니, 세월호 참사의 한복판이었다. 그때만 해도 세월호 뉴스와 <밀회>의 간극은 아주 커 보였다.
그리고 얼마 전 유아인의 팬 계정을 둘러보다가 <밀회>의 짧은 영상을 보았고,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얼떨결에 ‘정주행’을 시작했다. 나는 그때 ‘성지 드라마’ 논란에 대해 알지 못했다. 문제의 장면들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그다음은 예상하는 대로다. 예술대학 부정입학자로 정유라라는 이름이 등장했고, 어떤 장면에선 정유라에 이어 최태민이 호명되었으며, 정유라의 어머니는 드라마의 주무대인 서한예술재단 이사장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는 무속인이고, 정유라는 출석도 하지 않고 큰소리치는 안하무인, 교수들은 그걸 봐주는 빌미로 한몫 챙겨보려는 속물들이고….
그뿐만 아니다. 서한그룹 회장의 딸 서영우는 호스트바 출신의 젊은 남자에게 수입 의류매장을 차려주는데,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둘이서 회사 이름까지 지어놨다? 서한의 서, 서영우와 신우성의 우, ‘서우’.”(여기서 고영태의 고, 최서원(최순실의 개명한 이름)의 원, ‘고원기획’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차움(Chaum)’ 간판도 나온다. 오혜원은 태블릿PC를 들고 다니며 서한그룹가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고 그들의 더러운 뒤치다꺼리를 도맡는 대신 제 실속을 차리는 “작은 여우”, 말하자면 서한그룹의 ‘비선 실세’다. 어두운 밤, 필기체의 차움 간판은 그런 오혜원의 뒤에서 지극히 명백한 태도로 형형히 빛나고 있다.
배우 김희애와 유아인이 출연한 JTBC 드라마 '밀회' 포스터
작가는 다 알고 있었나? 많은 이들의 관심이 여기에 쏠린다. <밀회>의 정성주 작가는 이에 대해 “우연의 일치”라는 입장을 내놨다. 추측건대 이것은 꼼꼼한 취재가 만들어낸 우연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내게 오히려 두렵게 느껴지는 것은 이쪽이다. 이것이 어떤 ‘전형’이고, 저 세계의 어느 부분을 잘라내도 지금과 같은 우연이 가능하다면, ‘최순실 게이트’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무게는 지금보다 수십 배로 더 무거워진다. 최순실과 박근혜를 부순다고 해서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견고한 세계. 그 세계에서 통용되는 기괴하지만 보편적인 게임의 법칙. 우리와 먼 데 있다고 생각했던 그 게임의 법칙은 결국 300여명을 바닷속에 수장하는, 피부에 와 닿는 공동의 파국을 만들어냈다.
<밀회>의 안판석 감독은 말했다. “테두리를 벗어나는 게 불안해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인간은 영원히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밀회>는 한마디로, 거기서 벗어나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다. 오혜원이 나이 사십에 내가 어디 서 있는지, 내가 문제인지 사회가 문제인지, 사회가 문제라면 나는 얼마나 공범 노릇을 했는지 깨닫게 된다. 그걸 박차고 나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 채로 체념하고 산다는 건 얼마나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일인가.”(<아이즈>, 2014)
오혜원은 이선재(유아인)라는, 트랙에서 비켜난 자유로운 존재를 만나는 희귀한 기회를 얻는다. <밀회>는 그렇게 테두리를 박차고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며 끝이 난다. 아마도 우리가 <밀회>에서 다시 보아야 할 것은, ‘숨은그림찾기’가 아니라 이런 것이 아닐까.
이로사 | TV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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