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형사들의 협력 수사를 다룬 <공조>가 650만 관객을 돌파하며 새해 첫 흥행 대박영화로 떠올랐다. 영화계에선 벌써부터 올해 극장가 최대 흥행 키워드로 ‘북한’을 지목한다. 톱스타와 유명 감독을 내세운 기대작들 가운데 유독 북한 소재가 많아서다. <변호인> 양우석 감독과 정우성, 곽도원이 뭉친 <강철비>, <신세계> 박훈정 감독에 장동건, 김명민, 이종석이 합류한 <V.I.P>, <군도> 윤종빈 감독과 황정민, 조진웅, 주지훈 등이 협력한 <공작> 등 참여명단만 봐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의 핵심요인으로 분단의 긴장이 액션 블록버스터의 매력적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꼽는다. 2013년 <은밀하게 위대하게>, <동창생>, <용의자> 등 이른바 ‘꽃미남 북한 용병 3부작’의 흥행을 지나 2015년 <연평해전>, 지난해 <인천상륙작전>을 거쳐 올해의 분단 블록버스터 러시 현상까지, 북한 소재가 점점 본격 오락물로 소비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다.
분단 현실이 장르물의 인기 소재로 떠오른 것은 최근 몇 년간 TV 드라마에서도 두드러진 현상이다.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벌어질 제2차 한국전쟁을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첩보원들의 이야기를 다룬 2009년 KBS 드라마 <아이리스>가 본격적인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드라마 <불어라 미풍아>의 한 장면.
2010년에는 한국전쟁 60주년을 기념해 MBC <로드 넘버원>, KBS <전우> 등 두 편의 전쟁드라마가 액션블록버스터로 제작되었고, 2011년에는 남북한 첩보원들과 국제 테러리스트들의 대결을 그린 SBS 드라마 <아테나: 전쟁의 여신>이, 2013년에는 <아이리스2>가 방영되었다. 그런가 하면 2014년 방영작 SBS 정치액션스릴러 <쓰리 데이즈>에서는 부패한 자본가와 대통령이 연루된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을 핵심 미스터리로 풀어낸 바 있고, 같은 해 SBS <닥터 이방인>은 남북 고위층의 음모에 휘말린 탈북인 의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의학드라마에 첩보스릴러를 결합한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화제를 모았다.
주목할 지점은 이러한 트렌드가 구축된 시기다. 가령 냉전이 종식되고 군사정권이 몰락한 1990년대 들어와 대중문화 속 북한 관련 콘텐츠에 일어난 가장 뚜렷한 변화는 반공 색채가 희미해지고 ‘거기에 사람이 살고 있었네’의 묘사가 주를 이루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영화 쪽에서 <간첩 리철진>, <공동경비구역 JSA>처럼 간첩과 북한군을 인간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 변화를 주도했다면, 드라마에서는 MBC 6·25 특집극 <이방인>, KBS 일일극 <우리가 남인가요>처럼 한민족으로 공존을 모색하는 탈북자들의 이야기가 분위기 전환을 이끌었다.
이러한 경향이 2000년대 후반 보수정권 등장 이후 경색된 남북관계로 인해 다시 한번 전환을 맞았다. 보수정권 이후 방영된 북한 소재 드라마들에서는 남북 긴장관계가 직접적 모티브로 활용되었다. <아이리스>와 <아이리스2>에서는 북한의 핵실험과 핵무기를 주된 서스펜스 도구로 사용하며, <쓰리 데이즈>에 묘사된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은 연평도 포격사건과 천안함 사건을 연상시킨다.
이 가운데 지난해 방영을 시작한 MBC 주말드라마 <불어라 미풍아>는 등장 당시부터 큰 관심을 모았다. 분단의 비극을 장르물로 소화하는 최근 트렌드를 거슬러 정면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장편 가족극 최초로 탈북인 가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고, 남북 갈등이 고착화되면서 희미해져버린 통일의 중요성을 환기했다. 북한 고위 엘리트층과 남한의 평범한 중산층 가족의 만남이라는 설정을 통해 기존 남북한 묘사의 위계적 구도를 뒤집은 도입부도 신선했다.
드라마는 평양대를 졸업한 엘리트 김미풍(임지연)이 고위 관료 아버지의 지위가 위태로워지자 가족과 탈북을 감행하고 남한에 정착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고고한 상류층에서 남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난한 소수자가 된 미풍 가족의 시련과 북한 ‘꽃제비’ 출신 박신애(임수향)가 남한의 속물적 자본주의에 눈 떠가는 모습 등 그동안 드라마에서 보기 어려웠던 탈북자의 현실이 다채롭게 펼쳐진 점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월남한 실향민이자 미풍의 친조부인 덕천(변희봉)의 1000억원대 재산을 둘러싼 대립, 미풍과 남주인공 이장고(손호준)와의 로맨스가 본격화되면서부터 드라마는 초반의 의도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미풍과 장고의 결혼을 반대하는 시어머니와의 갈등이나 미풍의 신분을 가로채 유산을 상속받으려는 신애의 악행이 ‘막장드라마’의 뻔하고 자극적인 전개를 그대로 따르기 때문이다. 유전자 검사결과 조작, 납치, 누명, 폭행과 같은 막장 범죄 행각에 기억상실, 실신, 엇갈림 등 갈등을 무한연장하기 위한 진부한 장치들이 모조리 동원된다. 이 과정에서 애초 기획의도였던 탈북인의 아픔과 분단의 비극적 맥락은 뒤로 저만치 밀려난다.
예컨대 장고의 모친이 미풍을 반대하는 이유에는 가난 혐오와 탈북인에 대한 소수자 혐오가 동시에 작용하지만, 막장드라마의 전형적 갈등 구도를 반복하면서 각기 다른 사회적 맥락이 휘발되어 버린다. 신애의 악녀 묘사도 마찬가지다. 신애가 미풍을 미워하고 덕천의 재산을 탐내는 이유에는 계급적 콤플렉스와 생존 본능이 밑바닥에 깔려 있으나, 그러한 심리는 막장드라마 특유의 ‘악행 에스컬레이팅’에 가려진 지 오래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애의 ‘막장 행각’이 점차 극단적으로 가면서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을 매회 경신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 작품이야말로 최근 북한 콘텐츠의 상업화, 오락화 경향과 그 위험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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