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과 혼연일체, 그룹 ‘백두산‘의 기타리스트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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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과 혼연일체, 그룹 ‘백두산‘의 기타리스트 김도균

전설이, 전설을 이야기하다

‘국민 할매’ 김태원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한국의 3대 기타리스트가 있다. 강북의 김태원, 강남의 신대철, 그리고 이태원의 김도균이 그들이다. 그중 유난히도 철옹성처럼 록의 자존심을 지켜온 김도균(48)이 세상 밖으로 한 걸음 나왔다.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기타리스트의 카리스마 이면에 노총각의 철없고 순수함을 지닌, 김도균을 만났다.

그를 위해 일부러 흡연 구역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도 굳이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정중하고 부드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대 위에서 보여주던 야성의 카리스마는 잠시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나 보다.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는 카페 창문 너머로 담배를 태우는 김도균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고독하고 외로운 로커의 뒷모습…. 홀로 30여 년의 세월 동안 록의 자존심을 지키며 쌓아온 감성의 깊이는 감히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의 인생 자체가 고독한 싸움의 연속이었다. 화려한 록의 전성기 때 그의 인생 역시 가장 아름답게 꽃을 피웠고, 길고 긴 록의 암흑기에도 단 한 번의 외도 없이 자신의 음악을 지켜왔다.


오랜 세월 동안 록 음악의 A부터 Z까지 철저히 지키고 살아온 록의 장인 같은 느낌이랄까. 190cm 거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대 장악력, 손이 보이지 않을 만큼 신의 경지에 오른 속주, 관중을 압도하는 음악적인 카리스마. 그런데 록 음악의 거대한 산 같은 그를 일상에서 마주했을 때, 무대와는 다른 그의 모습에 사실 ‘빵’ 터지고 말았다.

“이런 날씨에 가죽 바지를 입으면 땀 엄청 많이 나죠(웃음). 땀띠 때문에 연고를 바르지 않으면 못 견뎌요. 연고 바르고 꾹 참는 거예요. 사실 정말 더울 때는 제가 좋아하는 가죽 바지 못 입을 때도 있어요. 그래도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매일 입는 편이에요.”

경상도 남자가 표준어를 쓰기 위해 무던히도 애 쓰는 듯한 억양과 그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유머 코드,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은 순수한 눈빛은 의외의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해맑은 웃음은 세상에 물든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 만큼 순박해 보였다.

무지개를 쫓는 소년, 한국의 대표 기타리스트가 되다
 
한때 아웃사이더를 자처했던 김태원과 임재범이 요즘 방송계의 ‘대세’로 떠올랐다. 이들은 김도균과 함께 198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록 밴드 전성시대의 주인공이다. 임재범이 1대 보컬로 몸담았던 신대철의 ‘시나위’, 김태원의 ‘부활’, 김도균의 ‘백두산’ 공연 배틀이 공공연히 펼쳐졌고, 서로 실력을 겨루다 보면 팬들 사이에서도 경쟁구도가 이뤄지기도 했다.

최근 들어 김태원과 임재범의 활동이 부각되면서 1980년대부터 한국 록의 역사를 이끌어온 사람들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의 3대 기타리스트가 모여 삼성전자 갤럭시와 함께 하는 ‘하우 투 리브 스마트 레슨’ 영상을 촬영 하기도 했다.

“3대 기타리스트라는 말은 아마도 1980년대에 활발히 활동했던 대표주자라는 뜻일 거예요. 그 당시에는 서로 견제하고 은근히 경쟁하는 분위기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융화되는 것 같아요. 함께 연주하다 보면 서로 잘하는 분야를 파악하고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도 있기 때문에 참 기분이 좋아요. 이제는 누가 잘한다, 못한다를 떠나서 세 사람의 화음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고 생각해요.”

사실 기타를 잘 친다는 기준은 기술적인 부분보다 이른바 ‘필링’을 얼마만큼 호소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그만큼 듣는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연주라는 게 추상적이고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다. 연주자의 감성의 깊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1 영국 진출 당시의 모습. 맨 왼쪽이 임재범, 맨 오른쪽이 김도균이다. 2 1984년, 백두산 결성 당시 팬과 함께 찍은 사진. 3 28년간 김도균의 소리가 돼 준 기타. 아직도 백두산 공연때는 이 기타를 사용한다.
“음악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동심의 세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오직 음악만 바라보고, 음악에만 몰두하면서, 음악적 해답을 찾는 것만도 벅차요. 작은 기술적 차이로 느낌이 전혀 다른 음악이 나올 수도 있고…. 이런 노력을 통해 기쁨을 줄 수 있는 음악, 위안을 줄 수 있는 음악 등 듣는 사람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음악이 탄생하게 되는 거죠.”

그는 아직도 음악을 처음 접했을 때의 감동, 동심의 세계에서 만난 음악의 힘을 잊을 수 없다. 초등학교 5학년, 리코더 경연 대회에 나갔을 때 피아노의 굵은 선율과 리코더의 가녀린 음색이 만들어낸 강렬한 음악의 힘에 꼬마 김도균은 예술적 흥분을 느꼈다.

학교생활에 답답함을 느꼈던 중학교 2학년 때 록 음악에 빠져 친구들과 함께 3인조 밴드를 결성했다. 기타는 물론 베이스, 드럼에 앰프까지 구색을 모두 갖춘 진짜 밴드였다.

“당시 부모님께서 그냥 취미생활이라고 생각하셨나 봐요. 기타가 4만원 정도 했는데 아무 말씀 없이 사주셨거든요. 친구 집 지하실에 연습실을 차려놓고 밤낮으로 연습하니까 주변에서 시끄럽다고 난리였죠. 그래도 리코더를 연주했을 때 그랬듯이 기타를 연주하고 있으면 무척 행복했어요.”

초등학교 강당을 대여해 티켓을 팔고 직접 쓴 곡을 연주한 콘서트도 열었다. 이렇게 자신이 만들어낸 음악적 탈출구에서도 그는 여전히 목말랐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제도권 교육은 그를 더 옭아매기 시작했고 견딜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학교가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생일대의 결심을 했다.

“딱 1년 다니고 보니 더 이상 학교에 다니기가 싫어졌어요. 학교의 모든 것이 답답했어요. 이제부터 기타로 사회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집에는 학교 간다고 해놓고 집 근처 산에서 기타 연습을 했어요. 그렇게 일주일을 하니까 학교와 집에서 알고 난리가 난 거예요. 1남 2녀 중 막내아들이 학교 그만두고 기타 친다고 하니 호적에서 판다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죠. 그래도 제가 워낙 완강했기 때문에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어요.”

음악과는 거리가 먼 섬유 사업체를 운영하시던 부모님은 기타를 치기 위해 학교까지 그만두는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부모님과 일가친척들의 만류에도 그는 기타 하나 둘러메고 무작정 대구에서 상경했다.

“무지개를 쫓아간 소년이었죠. 무서운 줄도 모르고 음악 하겠다고 어른들의 세계, 음악의 세계에 뛰어들었으니까요. 그 당시 음악 하는 사람들은 다 낙원상가로 몰렸는데,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 팀을 만들어서 잡히는 대로 공연을 했어요. 밤늦게 공연이 끝나고 하숙집에 돌아오면 또 연습을 했죠. 톱 기타리스트를 따라 해보면서 계속 연마를 한 거예요. 그때가 제 인생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때예요. 물론 아직도 전셋집을 전전하지만 그 당시에는 담배 살 돈이 없어서 길거리에서 담배꽁초를 주워 피울 정도였으니까요.”

당시는 디스코 열풍의 시대라 1970년대 성행하던 라이브 카페는 자취를 감추고 모든 클럽이 댄스 클럽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1984년 신중현이 관여하던 국내 유일의 라이브 클럽 ‘라이브’가 생겼다. 김도균은 우연히 놀러 갔다가 무대에 오르게 됐는데, 관객의 반응이 의외로 뜨거웠다. 관객들의 열광에 클럽 사장으로부터 전속 출연을 제의받고 하루에 한 번씩 공연하기 시작했다. 소문을 들은 그룹 ‘부활’이 공연을 보러 찾아왔고 신중현은 기타를 치는 자신의 아들 신대철을 소개시켜줬다. 그것이 한국의 3대 기타리스트 간의 첫 대면이었다.

하지만 열정과 에너지의 발산이 많은 헤비메탈 무대를 매일 소화하다 보니 6개월이 지나자 심신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말이 쉽지 1백80회 공연을 연달아 한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연을 보러 온 많은 사람 중에 ‘서라벌 뮤직’ 사장과 유현상도 있었다. “언제든지 찾아오라”는 말을 기억해내고 찾아간 서라벌 뮤직에서 그는 백두산을 만났다.


외길 걷던 고독한 로커, 세상을 바라보다

1984년 김도균은 ‘백두산’으로 정식 음반을 발표하고 데뷔했다. 백두산은 앨범 두 장으로 일약 한국의 대표적 밴드로 급부상했다. 특히 그 당시 녹음 기술로는 제대로 담아내기조차 힘들었을 만큼 빠르고 강력한 김도균의 기타 연주는 모든 이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영광도 잠시, 백두산은 데뷔 3년 만에 앨범 두 장만을 남기고 전격 해체됐다.

머리가 긴 남자는 방송에 출연할 수도 없었고, 영어로 된 노래는 라디오에서조차 들을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멤버 네 명 모두 록의 자존심인 긴 머리를 유지했고, 2집 앨범 전곡을 영어로 불렀던 터라 ‘백두산’의 활동이 순탄할 리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국내의 문화적, 사회적 상황보다 너무 앞서갔던 경향이 있었어요. 미국과 영국의 록 음악과 동시대에 나란히 서고 싶다는 욕심만 있었던 거죠. ‘우리도 이만큼 할 수 있다, 록의 본고장에 서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데뷔 당시 김도균의 기타 연주에 대해 혹자는 “미국도, 영국도 아닌 근본은 없지만, 어쨌든 훌륭한 것만은 확실한 기타 연주”라고 평가했다. 이를 다시 말하면 단순히 선구자를 따라 하는 모방이 아닌, 독창적인 연주를, 그것도 아주 훌륭히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그가 음악 인생을 통틀어 완성하고 싶었던 한국적 록의 시초였을지도 모른다.

백두산 해체 이후 보컬인 유현상은 트로트로 전향했고 김도균은 영국으로 건너가 현지 뮤지션들과 ‘Sarang(사랑)’이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국내에는 더 이상 헤비메탈 록 밴드의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은 불편한 진실이었다. 그 후 임재범과 함께 ‘아시아나’를 결성했지만 1집 앨범을 내자마자 해체됐고 1988년 첫 독집 「Center of the Universe」로 ‘국악 록’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외로운 음악 여정의 결과물로 볼 수 있는 ‘김도균 그룹’을 결성, 「정중동」 앨범으로 한국적 록의 아우트라인을 그렸다. 이는 대중에게는 철저히 외면당했지만 한국 록 음악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앨범이었다.

“20대에는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렸어요. 혼자 활동해 나가면서 너무 안으로만 파고들었던 거죠. 점점 학구적, 전문적으로 디테일하게 몰두하다 보니 대중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어요. 하지만 결국 어느 순간이 되니까 넓은 시각으로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되더라고요. 일종의 깨달음이라고 할까? 음악은 무엇보다 대중이 들어줘야 그 역할을 다 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죠.”

‘대중에게 다가가기’. 이는 대중의 시선과 구미에 맞는 대중음악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자신이 만든 음악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자신의 음악을 소개하는 것, 예를 들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이 음악가의 감성을 감소시키거나 음악적 자존심을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데뷔 28년 만에야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태원의 역할이 무척 컸어요. 예술 세계와 대중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준 거죠. 장벽을 허물어준 셈이에요. 시대적인 변화도 무시할 수는 없죠. 사회적, 경제적으로 발전하다 보니 문화적인 관심과 소양이 1980년대와는 차원이 다르잖아요. 이제야 그때 우리가 하려던 음악을 이해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 같아요(웃음). 마치 오랜 동면에서 깨어난 느낌이에요.”

뜨겁거나 혹은 순박하거나

 
1964년생인 그는 아직도 인생의 반려자를 찾지 못했다. 어느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해 “여자를 위해 머리카락도 자를 수 있다”라고 한 것은 단지 웃기기 위해 한 말은 아니었다.

“결혼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안 한 것일 수도 있고…. 사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았어요. 어떻게 보면 내 삶의 길을 찾는 데 너무 급급했다고 할까. 음악을 하고, 음악인으로서의 해답을 찾기에 바빠서 다른 삶을 바라볼 수가 없었어요. 또 결혼을 하면 평범한 삶을 살아야 하잖아요. 제가 자신 없다기보다 상대방 입장에서 의심이 되나 봐요. ‘저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결국 끝까지 믿음을 주지 못했던 거겠죠.”

그래도 그에게 사랑은 있다. 로맨스가 있어야 음악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특히 음악을 주제로 대화가 잘 통하고 음악가의 자유로운 생활을 이해해주는 외국 여성과 여러 번 데이트를 한 경험이 있다.

가장 최근 만났던 여자친구도 아일랜드 출신 여성이다. 여러모로 잘 통하고 결혼 이야기까지 진전된 진지한 만남이었다. 아일랜드에 계신 부모님도 만나뵙고 적극적으로 결혼을 고려해봤지만 결국 지역적인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삶의 터전이 각자의 나라에 있다 보니 결혼을 위해 한 사람의 인생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저는 지금도 생각해요. 최소한의 삶이 유지될 수만 있다면 음악만 하면서 사는 거예요. 음악적 조건만 유지되면 살아갈 수 있는 거죠.”

김도균에게 음악과 삶은 동의어다. 살아 있으니 음악을 하고, 음악을 할 수 있어서 사는 것이다. 그 밖에 남들이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특히 경제적인 부분에서 돈은 쓰고도 남을 만큼 벌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음악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화폐가 도래”할 수는 있는 노릇이지만 돈을 벌기 위해 음악을 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대한 아무런 욕심 없이 해탈의 경지에 올라 예술의 혼을 불태우는 김도균에게 속세에 찌든 기자가 물었다.

“보험은 드셨어요?”
“국민건강보험은 꼭 내야 한대요. 그래서 그건 내고 있는데, 국민연금은 2년간 유해해준다고 해서 미뤄두고 있어요.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면 국민연금도 넣을 생각입니다.”

김도균은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직도 몸에 달라붙는 가죽 바지를 입고, 긴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쓸어 올리며 록 음악의 본질과 소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었다. 설악산에 올라가 기타 연주에 5백 개의 피크를 다 쓰고서야 하산했다는 젊은 시절의 의지와 열기는 아직 꺾이지 않았고 화려한 기타 연주 실력 또한 녹슬지 않았다. 여전히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음악 세계를 고수하며 음악적 욕심 외에는 세상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김도균, ‘뼛속까지 로커’라는 말을 절절히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글 / 진혜린(객원기자) ■사진 / 이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