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성악가 조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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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보기=====/김제동의 똑똑똑

(39) 성악가 조수미


 
ㆍ“미혼모·입양아… 세상의 아픔에 다가갈수록, 음악 깊어져”

 



-누나, 오늘도 빨래하고 계셨던 건 아니죠?


“요즘은 세제가 참 좋은 것 같아. 예전엔 빨래하고 로션을 발라야 했는데, 요즘은 그냥 둬도 부드럽고 좋던데요?”


시작부터 웬 빨래타령? 그것도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디바’ 조수미(48)를 만나서 말이다. 그 이유는 지난해 MBC <7일간의 기적>을 위해 ‘누나’를 만난 날에서 비롯됐다. 클래식 문외한인 나에게 조수미라는 이름은 구름 위의 세계나, 책에서나 만날 법한 것이었다. 그런 설렘으로 가득했던 나에게 누나가 불의의 일격을 날렸다. “제동씨 만난다니 긴장돼서…. 긴장 풀려고 빨래하다 왔어요.”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때 놀랍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어요. 이렇게 한강이 보이는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에서 빨래하는 누나 모습을 상상해 봤거든요.



김제동 “자기를 놔주는 연습을 하려는데 잘 안돼요.” 조수미 “힘들어요. 카라얀이 ‘음악을 하다가 음악을 놓을 수 있는 방법을 배우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방법을 안 가르쳐주고 돌아가셨어요.” _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공주같이 공부만 하고 살다가 혼자 유학가서 긴장하고 살면서 그런 습관이 생겼어요. 그땐 빨래하면서 눈물 많이 흘렸는데…. 인간은 혼자 태어나서 살다가 간다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면 외로움이 덜하잖아요. 그런데 전혀 모르는 사람들, 언어도 시차도 생활습관도 모두 다른 곳, 게다가 동양인으로서는 불가능하다던 오페라를 하기 위해 본고장에 간 거잖아요. 지금에야 웃으면서 이야기하지, 수십년 전에 어떻게 그랬나 싶어요. 인터넷도, 휴대폰도 없는 1980년대 초였거든. 1983년 3월27일.”


-어떻게 그 날짜를 기억해요? 


“거의 매일 일기를 썼어요.”


-전 대구에서 혼자 서울 와도 힘들던데, 누난 진짜 힘들었을 것 같아요. 


“여자라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그 당시 대학교 1학년을 다니다 갔는데 이탈리아라는 곳이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롭고 개방적이었어요. 차원이 달랐지. 길거리에서 애정표현을 하는 것도 예사고, 누구나 자기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했어요. 그때 우리 사회 분위기를 생각해 봐요. 예술가들도 억압돼 있었고, 젊은이들도 많이 힘들었잖아요. 그런 사회에서 살다가 자기 자신에 대한 표현이 자유로운 나라에 가서 굉장한 문화적 쇼크를 받았어요.”


-제가 경북 영천 촌에서 코흘리며 뛰놀고 있을 때였네요. 그때 데모하는 모습이 TV에 나오면 어른들이 ‘다 나라 망칠 빨갱이다. 잡아넣어야 한다’고 욕하는 것 들으면서 맞장구쳤고, 어린 맘에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했던 기억이 나요. 


“난 그 시절, 여느 음악하는 사람처럼 굉장히 좁게 살았어요. 자주 휴강을 했는데, 그저 공부 안하니까 좋다는 생각만 했어요. 그때 남자친구는 시위하러 나갔고, 난 그가 다치지 않길 바라면서 걱정하고. 완전히 내 개인만 보던 어린 여자아이에 불과했죠.”


-누나 입장에선 그게 당연할 수도 있었겠죠. 어쨌든 그렇게 작고 여리던 동양의 소녀가 혼자 나가서 이렇게 되기까지 스스로 겪었던 갈등, 외로움이 엄청났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무서웠을 것도 같고.


“내가 의외로 무서움을 안타요. 1983년 그때 27시간 걸려 로마공항에 내렸더니 새벽 3시더라고. 나와 있기로 한 사람도 없고, 비도 왔어요. 말도 안 통하고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그런데 희한하게 하나도 무섭지 않은 거야. 무작정 택시를 타고 스페인 광장으로 가자고 했어요.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그 장소…. 허름한 여관에 짐을 풀고 다시 나가서 새벽 5시까지 계속 비를 맞으며 걷는데 그 자유와 통쾌함, 흥분은 잊혀지지가 않아요. 그러면서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잘 쓸 것인가 하는 책임감이 어렴풋이 들더라고요. 처음 3개월간은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죠. 고작 스물한살이었는데 내가 해결하고 결정해야 할 큰 문제가 어찌나 나를 덮쳐 누르던지…. 도망칠 수도 없었어요. 그렇게 음악원에 들어가 세계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이 노래하는데 ‘게임이 되겠다’ ‘해 볼만 하겠다’고 한 거죠. 다른 학생들이 나를 부러워하고 심지어 가르쳐달라고 했거든요. 성악은 다른 악기와 달리 재능이 중요하거든요. 다행히 재능을 타고났고 그걸 부모님과 선생님이 알아본 거죠.”


-미모도 타고났잖아요. 


“아, 왜 이래. 이렇게 예쁜 말을 하니까 내가 제동씨를 안 예뻐할 수가 없어. 학교 다닐 땐 내가 구경거리였어요. 당시 이탈리아에 동양 여자도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자기 나라 말로 오페라를 하니까 놀란 거지. 어떤 학생들은 와서 내 머리카락을 만져 보기도 했어요.”


-마치 1970년대에 우리나라에 온 백인 여자가 판소리를 엄청 잘하는 느낌이었을 것 같아요.


“그렇죠. 그렇게 5년 과정 학교를 3년 만에 졸업했어요.”


-저와 정반대의 인생이네요. 전 2년제 학교를 11년 다녔는데…. 졸업하고는요? 


“콩쿠르 나갔죠. 상금이 꽤 쏠쏠해서 그걸로 생활고를 해결하겠다는 마음으로. 당시에 1등 상금이 5000달러 정도 됐거든요. 거의 휩쓸었죠. 그걸로 집에서 부쳐오던 경제적 원조 끊고, 레슨비 내고 집세도 내고 차도 샀어요.”


-국제 성악 콩쿠르계의 ‘바람의 파이터 최배달’이네요. 입상을 못한 적도 있어요? 


“처음 도전했던 콩쿠르죠. 그때 노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란 걸 느꼈어요.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콩쿠르인데 내가 노래하고 난 뒤 관객들의 환호도 엄청났고, 현지 신문에는 최연소 참가자인 나를 칭찬하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렸어요. 그런데도 탈락했죠. 알고 보니 그 해가 핀란드와 중국이 국교를 맺는 해였기 때문에 심사위원 대부분이 중국인이었고 1~3위 입상자도 중국인이었어요.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삶과 꿈’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그들이 가진 것을 넘어설 정도로 실력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나만 가질 수 있는 정체성을 계발해 그들이 지속적으로 호기심과 관심을 갖도록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죠.”


-너희들이 하는 것은 나도 다 할 수 있고, 너희가 갖지 못한 것도 내가 갖고 있다는 걸 보여줬던 거네요.


“예를 들면 오페라 아리아를 부른 뒤 앙코르로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불러요. 우리나라의 정치적 배경을 설명해 준 뒤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함께 눈물을 흘려요. 그렇게 음악을 통해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하나가 돼요. 난 드레스도 앙드레 김 선생님의 의상만 입어요. 오히려 그런 점이 서양의 소프라노 가수와는 다른 분위기의 프리마돈나로 나를 기억하게 만든 것 같아요. 그리고 프리마돈나라는 말에는 대중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먼 곳의 여신 같은 이미지가 수백년째 내재돼 있어요. 그런데 내 생각은 그게 아니거든요. 대중의 마음도 꿰고 그들과 소통해야 하는 것이 현대의 프리마돈나라고 봐요.”


-클래식 하면 왠지 거리가 느껴져요. 천상에서 울려퍼지는 위압적인 음악을 한다는 생각이죠. 그런데 순수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기가 쉽지 않잖아요.


“쉽지 않죠. 특히 우리처럼 클래식 하는 사람은 나만의 음악세계를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고도의 고음이나 테크닉도 ‘별 것 아니다. 그렇지만 너희는 절대 못 해’ 하는 식으로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마음이 깔려 있는 거죠. 그러다 보니 대부분이 누군가 우러러 봐주고, 뭔가 신비롭게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에요.”


-그런데 그걸 내려놓은 거네요. 터닝포인트가 있었나요?


“아마 2000년쯤? 뉴욕에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보면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쉬운 음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요나 팝과 같은 음악은 매일의 삶을 함께하지만 그들에게 라흐마니노프나 쇼스타코비치를 내민다면 너무 건너기 힘든 강이잖아요. 그래서 생각한 게 <온리 러브>라는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가교와 같은 앨범이었어요. 대중적 인기는 좋았는데 내가 부른다는 이유로 고고한 분들이 문제를 삼았죠. 클래식의 격을 낮춘다고. 그래도 밀고 나갔어요. 그게 국민에 대한 문화적 서비스라고 생각한 거죠.”


-고고한 분들에겐 뭐라고 했어요? 


“사실 음악은 설명이 필요없어요. 노래로 다 설명이 되거든요. 음악은 예쁜 조형물이 아니잖아요. 25년간 내가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내 진심이 사람들의 마음을 스쳤기 때문인 것 같아요. 지금까지 그렇게 에너지를 쏟고 달려왔는데 이제 나이 들어 보니 내가 가진 것을 어떻게 나눌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버지 장례식 때도 무대에 섰고, 동생 장가가는 것도 못 볼 정도로 바쁘게 살아왔거든요. 뿐만 아니라 난 살면서 일부러 안 봤던 게 굉장히 많아요. 나한테 나쁘다, 노래하는 데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뭔가 슬프거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으면 목이 메고 눈물이 나서 노래를 못할 지경이 되거든. 그래서 더 외면하고 지냈어요.”


수미 누나가 세상에 눈을 뜬 건 5~6년 전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루에 공연차 갔을 때였다고 했다. 파벨라라는 빈민촌. 공연 이틀 전에 위험하다는 스태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곳을 찾았다. 똑같은 생명으로 태어나서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아이들이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구하는 장면은 누나에게 충격이었다. 돈 많은 사람들이 누나의 공연 티켓을 사고, 그네들이 만족할 만한 노래를 불러주면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었다. 그 순간을 위해 노력하고, 연습해왔던 세월들이 일순간에 무너졌다. 당시 묵고 있던 5성급 호텔의 스위트룸에 돌아와 화려한 욕조에 들어갔지만 마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이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어떤 마음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음악이라는 담을 무너뜨리자고 생각하게 됐어요. 내가 아름다운 음악인으로 살려면 세상을 보고 만지고 느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내 음악이 심오해질 수 없다고. 지금까지 내가 힘들다고 외면했던 것을 이제라도 직면하자고. 그렇게 미혼모, 입양아, 유기견까지 만나면서 내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감사하고 눈물나는 것인지 알게 됐어요. 그리고 그만큼 내가 해야 할 일도 많아진 거죠. 나 사실 몸을 무척 사리거든요. 노래해야 하는데 컨디션 나빠지면 안되니까. 그래서 비오는 날은 밖에도 안나갔는데 얼마 전에도 비가 쏟아지던 날 유기견보호소에 가서 한참을 씻겨주고 왔어요. 정신적으로 충만하고 행복하니까 오히려 컨디션이 최고였죠. 이젠 현실을,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눈 부릅뜨고 볼 거예요.”


-외롭고 힘든 고충도 있겠죠.


“화려해 보이겠지만, 많죠. 목표에 올라선 뒤 그걸 유지하고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 그게 엄청난 책임감을 요구하거든요. 목에 문제 있을까봐 술 한잔도 못마시고, 기름진 음식도 못먹고, 친구들과 수다도 많이 못떨어요. 컨디션 걱정 때문에 잠도 푹 자지 못하고. 호텔방에만 얌전히 있는 거죠.”


-그런데 어디 가서 하소연하기도 힘들잖아요. 게다가 늘 사람들을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 것도 괴롭죠. 누나하고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저도 토크콘서트라는 것을 하는데 무대 오르기 전에는 무지하게 긴장되고 예민해져요. 그런데 막상 무대에 올라가면 저도 모르게 힘이 나고 편해지더라고요.


“그건 재능이고 저력이에요. 그냥 나오는 게 아니죠. 평소에도 사람들이 솔깃하게 귀를 세울 만한 화제를 준비하고 있었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하니까 나오는 거죠. 그냥 귀신 씌여서 되는 건 아니거든요. 게다가 제동씨나 나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대치가 있고 내 스스로 만드는 기대치가 있어요. 그러다 보니 스스로를 끊임없이 팽팽하게 조여요. 잘못하면 끊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그걸 잘 조절해야 해요. 때로는 끊어지지 않도록 적절한 때에 놓는 법도 배워야 하고.”


-누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결국 내가 나를 보듬어주고 품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람마다 크고 작은 고통 없는 사람이 없잖아요. 다 힘들어요. 그럼에도 아침에 눈 떠서 오늘 하루를 선물로 받아들이고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런 사소한 습관을 통해 자기 삶의 의미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도 왜 이렇게 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보톡스도 맞고 싶은데 병원 갈 시간도 없고, 사우나 한번 맘놓고 할 여유도 없고.”


-누나가 안하는 거죠 뭐. 누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안하세요? 


“멋진 자연과 아름다운 광경을 볼 때, 맛있는 것 먹을 때? 그런데 괜찮아요. 혼자 노는 게 습관이 됐어. 큰일이지?”


-저도 그런 단계에 간 것 같아요. 누가 옆에 있으면 신경 쓰일 테니 오히려 혼자라서 더 좋다 싶고.


“좋은 징조는 아닌 것 같은데? 자기는 그런 상태가 너무 빨리 오는 것 같아. 난 강아지 3마리랑 10년을 같이 지냈잖아요. 이 아이들과 함께 뛰고 자연을 즐기면 그걸로 좋아요. 노래할 때만큼.”


-누나 얼마 전에 유기견 방지 교육센터 만드는 데 힘을 보태셨다면서요? 효리도 관심 많거든요.


“기사 봤어요. 이효리씨 보면서 강단 있고 속이 참 깊다는 생각이 들었죠.”


-저랑은 어떤 사이인지 아시죠?


“친구 사이? 이야기는 서로 잘하지만 잘 때는 따로 가서 자는.”


‘일격’으로 시작된 누나와의 만남은 이렇게 ‘비수’로 마무리됐다. 여하튼 ‘누나 부자’인 나는 조수미라는 ‘세계적인 누나’를 갖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