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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한 분석과 준비로 완벽하게 표현해내는 ‘하정우’표 캐릭터
배우 하정우(35)의 수식어는 ‘하대세’다. 뭘 해도 되는, 대세라는 의미다. 그만큼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2008년 영화 ‘추격자(507만 명)’, 2009년 ‘국가대표(848만 명)’, 2012년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471만 명)’에서 보여준 흥행 파워는 지난 1월 30일 개봉한 영화 ‘베를린’으로 이어졌다. 비단 관객 수뿐 아니라 그의 모든 것이 화제가 되고 있다. 유독 돋보이는 그의 먹는 연기는 ‘하정우 먹방(먹는 방송)’이란 이름으로 수많은 패러디 영상을 낳았다. 심지어 ‘베를린’에서 긴박한 상황에서도 반듯하게 써내려간 글씨까지 화제가 되고 있다.
하정우는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주먹만 한 얼굴에 새겨 넣은 ‘꽃미남’은 아니다. 그의 인기는 외모보다는 오랜 시간 갈고닦아온 연기와 자연스레 전파되는 인간적 매력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인간적인 매력이 빛나는 하정우는 진지함과 유머를 넘나들면서 인터뷰도 맛깔나게 요리했다.
“요즘 무척 바빠서 ‘베를린’ 흥행의 맛은 맘껏 느끼지 못하고 있어요. 무대 인사도 다니고 (감독과 배우들과) 같이 술도 좀 마셔야 느낌이 나는데, 개봉하고 나서 류승완 감독님과 맥주 한 잔 못했어요. 무대 인사도 배우들이 각각 찢어져서 하고 있어 만나지 못했죠. 지금은 영화 ‘더 테러 라이브’ 촬영 때문에 주로 파주에 있습니다.”
처음 ‘베를린’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그가 느낀 건 ‘힘들겠다. 고생스럽겠다. 이거 대체 어떻게 찍겠다는 거야’였다고 한다. 다만 베를린이 주 촬영지라 멋지게 나오겠다는 점이 위로가 됐다.
영화 속에서 하정우는 영웅 칭호를 받은 북한의 최고 첩보 요원 ‘표종성’으로 나온다. 류승범이 북한 고위층의 아들인 ‘동명수’로 나와 그와 대척점을 이룬다. 1980년생인 류승범만 해도 반공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1978년생인 하정우는 반공교육 세대다. 그는 간접 경험만으로 훌륭하게 북한 최고 요원을 그려냈다.
“재일교포 양영희 감독이 북송된 친오빠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영화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을 많이 떠올렸어요. 예전에 ‘황해’를 찍으면서 만났던 사람들도 도움이 됐죠. 친가와 외가 모두 이북 출신이라 거기서 받은 느낌도 있어요. 그런 나름의 해석과 짐작으로 표종성을 그렸죠. 이분들의 특징은 뜨겁고 말이 길지 않다는 거예요. 영화에서도 등장하는 ‘일 없다’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무서운 말이더라고요. ‘다음 얘기하지 말고 날 내버려둬’ 같은 느낌이에요. 뭔가 잔소리를 하려는 아내에게 ‘일 없다’라고 하는 건 ‘말하지 말고 씻고 잠이나 자라’라는 말이나 같죠. 경상도 남자나 가부장적 아버지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정우는 자기가 맡은 인물을 꼼꼼하게 연구해 안에 쌓아두었다가 연기할 때 그것을 녹여내 보여주는 사람 같았다. 영화에선 미처 다 드러나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그는 늘 생각하고 있었다.
“표종성은 평양 출신도, 엘리트 출신도 아니에요. 시골에서 공부하다가 특출한 능력 때문에 중앙당의 부름을 받고 요원으로 길러졌죠. 부모 곁을 떠나 합숙 생활을 하면서 일방적인 주입만 받았기 때문에 소통하는 데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아내인 련정희(전지현 분)에게 사랑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의심하는 표종성의 캐릭터를 이같이 이해하고 연기했다. 외로운 표종성과 자신의 모습 간에는 비슷한 점도 있다고 했다.
“저도 20대의 대부분을 자립심을 키우는 시간으로 보냈어요. 부모의 울타리를 떠나 혼자 생활하면서 혼자 일어서고, 치유하는 방법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는 점이 제가 표종성과 겹치는 부분이죠. 이전에 제가 맡았던 ‘추격자’의 살인마 ‘지영민’이나 ‘국가대표’의 입양아 선수 ‘차헌태’, ‘황해’의 ‘김구남’ 모두 조직에 속하지 않고 홀로 일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동안 시나리오를 보면서 공감이 되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홀로 일하는 주인공을) 선택한 건데, 아마도 그들의 심정이 저와 비슷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맛깔 나는 먹는 연기 비결은
그가 주로 맡아온 고독한 극중 인물과는 달리 실제 촬영장에서의 하정우는 인기가 많다. ‘베를린’ 촬영장에서 하정우 덕분에 항상 웃으면서 촬영했다고 말하는 전지현은 그를 “여자였으면 질투 났을 정도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다”라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선배인 한석규와 후배인 류승범도 ‘촬영장 분위기 메이커’인 그를 칭찬했다. 류승범은 베를린에 전기밥솥까지 가져와 한국 요리를 해준 하정우에 고마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사실 요리를 잘하는 하정우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연기로도 유명하다. 영화 ‘황해’에서의 컵라면과 핫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서의 중국 요리 등 하정우가 음식을 먹는 장면은 어김없이 화제가 됐다. 신인 시절 잠깐 등장한 KBS-1TV 드라마 ‘무인시대’에서의 백숙 먹는 연기도 그랬다. ‘황해’ 때는 편의점에서 ‘하정우 세트’를 팔기도 했을 정도. ‘베를린’에서도 어김없이 특유의 먹는 연기가 있었지만, 표종성 캐릭터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라 그 장면을 삭제했던 제작진은 개봉 후 온라인으로 하정우의 먹는 연기를 공개했다.
“먹는 연기에 대한 특별한 노하우는 없어요. 좀 더 먹는 것에 집중하는 정도죠. 연습도 전혀 안 해요. 다만 평소에도 식성이 좋아요. 못 먹는 음식도 없고 요리도 좋아하죠. 김수미 선생님의 간장게장처럼 ‘하정우 크림빵’ 같은 걸 만들면 어떨까요?(웃음) 아니면 국토대장정 기록을 담은 영화 ‘577 프로젝트’처럼 맛집을 리얼하게 평가하는 작품을 만드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요. 소문난 맛집 백 곳을 다니면서 ‘맛없으면 맛없다, 맛있으면 맛있다’라고 솔직하게 평가하는 거죠.”
직접 쓴 시나리오로 감독 도전
인기 절정에 있는 하정우는 현재 충무로에서 캐스팅 0순위다. 그는 시나리오를 보는 남다른 기준을 소개했는데, 이를 설명할 때도 특유의 유머 감각이 드러났다.
“첫 번째는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그리고 두 번째는 제가 할 수 있는 캐릭터냐는 거예요. 할 수 있다는 것은 이야기 속에서 캐릭터의 상황과 행동이 이해가 되느냐에 달려 있어요. 이야기를 영화적으로 풀다 보면 조금 무리한 설정을 할 수 있는데, 그런 점들이 전 좀 불편해요. 다만 억지 설정이 있어도 감독과 대화로 수정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면 동참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같이 나오는 배우들이 누구냐는 건데, 요즘에는 제가 첫 번째로 캐스팅이 되기 때문에 그런 고민은 없어졌어요. 그리고 마지막은 개런티를 얼마나 깎으려고 하느냐죠(웃음).”
출연료를 깎아주는 기준도 명확했다.
“전체 제작비가 적은 영화인 경우엔 상대적으로 제 출연료도 적어지죠. 또 저와 분담할 수 있는 배우들이 나오느냐는 건데, 만약 제가 원톱(단독 주인공)이면 협상이 불가합니다. 원톱이면 혼자 많은 것들을 해결해야 하거든요. 홍보할 때 혼자 1백여 군데 인터뷰를 해야 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전면에서 화살을 맞아야 하니까 출연료라는 어느 정도의 보험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베를린’처럼 멀티 캐스팅이면 전지현을 보러 오는 관객도 있고, 류승범의 팬도 있고, 한석규 선배님을 좋아하는 관객도 있잖아요. 그런 부분은 제 입장에선 덤으로 얻어지는 거죠. 또 만약 안 좋은 부분이 있어도 같이 짊어질 수 있으니 리스크가 줄어들고요. 게다가 촬영 회차도 67회로 끊어주고, 베를린에서 촬영하면서 해외 문물을 접할 수 있는 기회도 줬으니까 깎아줄 수 있는 여지가 있죠. 그래서 그만큼 깎아줬어요(웃음).”
최근 하정우는 ‘롤러코스터’라는 영화로 감독에 도전했다. 영화는 한류 스타가 탄 비행기가 예기치 못한 태풍 때문에 추락 위기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베를린’에서 함께한 류승범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정우가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그는 직접 메가폰을 잡아보니 감독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베를린’이 끝나고 4개월 정도 시간이 생겼어요. 그래서 지금 나를 위해 진짜 필요한 게 무엇인가를 고민했죠. 여행을 갈까도 생각해보고, 단기 연수를 받을까도 고려해봤는데 딱히 끌리지 않았어요. 그때 영화를 찍으면서 지쳐 있기도 했는데, 앞으로 더 건강하게 오래 영화를 찍기 위해선 감독의 역할에 대해 잘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큰 용기를 냈죠.”
그는 감독 역할을 하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오디션을 다니면서 막막했던 예전 기분을 느꼈다고 말하며 ‘앞이 컴컴했다’라는 표현을 썼다. “그런 심리 상태였으니까 ‘뺑소니범’도 잡으러 뛰어가지 않았겠느냐”라며 웃었지만 그만큼 그때의 절박함이 전해졌다.
“배우로서 연기를 할 땐 절반 이상의 확신을 가지고 가죠. 그래서 현장에서도 자신 있게 의견을 내게 되는데, 제가 감독일 때는 그런 부분이 무척 부족해지더라고요. 뭐가 맞는지 판단하기 힘들었고, 객관성도 잃게 되고요. 배우가 제가 쓴 대사 한마디를 고치는 것에조차 민감해졌죠. 그러면서 그동안 같이 작업했던 감독들의 얼굴이 보였어요. ‘내가 참 많은 사람들을 무너뜨렸구나’, ‘철없이 굴었구나’라고 반성했어요. 그러면서 주연배우로서 앞으로는 그런 부담을 덜어줘야겠다는 생각도 했죠.”
하정우는 지난 1월 말, ‘롤러코스터’ 촬영을 마치자마자 다음 작품인 영화 ‘더 테러 라이브’의 제작사로 출근했다. 그곳에서 신인인 김병우 감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한 대화를 통해 감독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고 촬영장 분위기도 더 즐거워졌다고 했다.
50대 액션 배우를 꿈꾸는 열정
하정우는 평소 진지한 이야기로 감동을 주다가도 또 적당한 타이밍에 유머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린다. 관객을 웃겼다 울리는 잘 만든 영화같이 ‘밀당’을 잘하는 셈이다. 감독 데뷔 경험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던 그는 ‘롤러코스터’의 개봉 시기를 묻자 또 하정우표 유머를 던졌다.
“후반 작업 양이 많아서 9월쯤으로 좀 늦췄어요. 워낙 시나리오가 후지다 보니 CG(컴퓨터 그래픽)와 음악으로 포장을 잘해야 해요(웃음). 제작비를 그쪽에 ‘올인’하기로 했는데, 그러느라 시간이 좀 걸리네요. 또 여름엔 개봉 영화 라인업이 워낙 좋잖아요. 괜히 그런 데 끼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니 시기를 늦춘 것도 있어요.”
영화 ‘베를린’에서 몸을 던져 싸우고 구르며 추락했던 하정우는 차기작 ‘더 테러 라이브’에서는 테러범과 맞서는 앵커 역할을 맡았다. 멋진 액션 배우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그에게 액션 연기를 언제까지 하고 싶고, 또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브루스 윌리스나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액션을 보면서 참 정열적이라는 생각을 해요. 한국 영화도 50대 배우가 이끌어가게 되면 뭔가 더 탄탄해질 것 같아요. 최민식, 한석규 형같이 50대 초반의 선배들이 중심을 잡아주면 뒤따라가는 제 또래 배우들도 더 좋은 여건에서 연기할 수 있겠죠. 제 목표는 50대에도 주인공을 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이 유지됐으면 하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50대 액션 배우가 등장하지 못했다. 20, 30대 젊은 배우들이 단독 주연을 하던 풍토가 바뀐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할리우드를 보면 우리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하정우가 예로 든 배우 브루스 윌리스는 1988년부터 ‘다이하드’의 ‘존 맥클레인’ 형사를 맡아왔다. 벌써 25년째다. 실베스타 스탤론, 장 클로드 반담, 아널드 슈워제네거 같은 왕년의 액션 스타들이 모여서 만든 ‘익스펜더블’은 인기에 힘입어 속편까지 나왔다.
최근 국내 스타 감독과 배우들이 할리우드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면 한국의 영화 수준도 할리우드 못지않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도 수십 년에 걸쳐 신작을 내는 액션 시리즈가 나오지 말란 법은 없다. 그리고 만약 그게 실현된다면 그 주인공은 하정우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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