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크의 폭발 - 섹스 피스톨스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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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의 폭발 - 섹스 피스톨스의 등장

섹스 피스톨스. 2년 남짓한 짧은 활동 기간이었지만 그 영향력은 엄청났다. (사진이 참 얌전해 보이게 나왔다)

곧 이런 뉴욕, 그리고 CBGB's를 중심으로 한 신드롬은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크림(Cream), 범프(Bomp), 아쿠아리안(Aquarian) 등의 펑크 성향의 관련 잡지들이 창간되었고(물론 내용은 CBGB's에서 생긴 일, 정도의 가십거리를 크게 벗어나진 못했다) 데드 보이스 등의 밴드는 물론, 보스턴의 모던 러버스(Modern Lovers, 사실 이들은 1973년에 데뷔한 이들이었다. 앨범도 존 케일이 프로듀스했다), L.A의 X 등 뉴욕을 벗어난 곳에서도 일련의 프로토펑크 밴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흐름과는 좀 구별되는 이도 있었는데, 가장 두드러지는 이는 역시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일 것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을 보고 록 가수가 되기로 했던 스프링스틴은 (사실 그의 가장 유명한 앨범은 84년작인 “Born in the USA” 이겠지만)73년부터 활동해 온 록 뮤지션이었고, “Born to Run” 같은 여러 앨범에서 미국의 노동자들의 생활상 등에 포커스를 맞춘 음악을 하였지만, 그는 60년대의 사운드에 가까웠던 정통적인 록을 연주하던 뮤지션이었고, 여타 펑크 밴드들과 달리 지극히도 미국적이었다. 이런 남성적인, 좀 더 리듬 앤 블루스의 원형에 가까웠던 음악이 분명히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시절, 뉴욕 펑크가 (보편적인 견해에서)펑크의 본격적인 시작이었음은 분명하다.



Bruce Springsteen - Born in the U.S.A


그렇지만 영국은 75년까지만 해도 별다른 펑크의 움직임을 보여 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당시의 영국의 록 음악의 주류라면 프로그레시브 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었지만, 록 밴드들의 공연은 이미 70년대 초반부터 양적으로 상당히 줄어든 상황이었다. 일단 이미 거물이 되어 버린 엘튼 존이나 핑크 플로이드 등은 세금이나 그 수익 등의 문제로, 영국보다도 오히려 미국에서 더 오래 활동하고, 그 반응도 미국에서 더욱 큰 편이었다. 70년대 초반 그래도 이 시절의 ‘젋은이들의 대변자’ 역할을 하던 데이빗 보위나 록시 뮤직 역시 여타 밴드들과 방향적으로 틀리지 않은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물론 그 시절 앨범도 훌륭하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말하자면, 1964년에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 킹크스 등의 밴드가 폭발적으로 등장하기 직전의 시대, 와도 상당히 비슷한 시대였던 셈이다.

곧 이전의 ‘건강했던’ 리듬 앤 블루스의 복귀를 얘기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현상은 (프로그레시브 록에서도 많이 나타났던)독립 레이블들의 등장일 것인데, 이미 거대 밴드들을 통해서 너무나도 강한 힘을 갖게 된 대규모 음반사들은 확실히 신인 밴드들에게는 가혹했다. 이를테면, 존 필(John Peel)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첫째, 누구도 쇼 비즈니스의 세계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런던으로 와서 스스로 자신의 몸을 똑똑한 흥행주에게 바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둘째, 70년대 중반 계약에 성공한 밴드들은 모두 이전에 성공했던 밴드들의 멤버를 적어도 한 명 이상 포함하고 있는 밴드였다는 것이다. (중략) 나는 브라이언 페리(록시 뮤직의 보컬)가 1972년 어느 날 우리 사무실에서 자기 밴드의 음반을 제작하기 위해 월터와 나를 설득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 나는 여기 앉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하지만 너희 밴드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없잖아!’ 라고 말이다.”

펑크와는 별 상관이 없지만, 이미 버진(Virgin) 레코드를 통해 등장했던 마이크 올드필드(Mike Oldfield)가 그랬고, 이미 ‘한물 간’ 로버트 와이엇을 “Rock Bottom” 으로 재기시킨 것도 이 버진 레코드였다. 이보다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고, 영화 ‘노팅 힐’ 의 ‘She’ 로 국내에는 팝 가수로 잘 알려져 있지만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도 이 당시 스티프(Stiff) 레코드를 통해 등장한 경우이다. 화장품 회사의 컴퓨터 기사였던 코스텔로는 배고픈 친구들의 심정을 대변하던 펑크 밴드들이 세상을 호령하던 시절, 뜬금없는 고시생 이미지(뭐, 버디 홀리를 닮은 외모라고 하는 것이 중평이지만, 내 눈에는 고시생이다)로 등장해 통렬한 비판과 확실한 주관을 보여주었던 뮤지션으로써,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싱어송라이터의 한 명으로 꼽힌다.

(솔직히 고시생 스타일 아닌가... 참고로 이 분, 27일에 내한공연 오십니다)


Elvis Costello - Less Than Zero(live)


그렇지만 역시 펑크의 폭발은,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를 맨 앞에서 얘기해야 할 것이다.

예술학교 졸업생이자 미국에서 자료수집을 위해 체류 중이었던 말콤 맥러렌이 더 스트랜드(The Strand)라는 무명 밴드에, 자신의 부띠끄의 일을 도와주던(!) 글렌 매트록(Glenn Matlock)과 존 라이든(John Lydon - 이 양반이 그 자니 로튼(Johnny Rotten)이다)을 끌어들여 만든 밴드가 바로 섹스 피스톨스였다. 이건 뭐, 딜레탕트도 이런 딜레탕트들이 없을 지경인데, 덕분에 밴드에 대해 내려오는 에피소드들도 셀 수 없다. 이를테면, 더 스트랜드는 결성 당시 가진 악기도, 악기를 살 돈도 없었기 때문에 이런 저런 악기들을 많이 ‘훔쳤는데’, 이를테면 데이빗 보위의 공연장이나 로드 스튜어트의 맨션 등에서 물건들을 훔쳐냈다. (이들은 대범하게도, 그 악기들로 로드 스튜어트의 커버곡을 연주했다고 전해진다)

1975년 11월 6일 성 마틴 예술학교에서의 공연을 시작으로 섹스 피스톨스는 (물론 기복 없이 말썽을 일으켰지만) 런던의 유명한 100클럽을 포함한 크고 작은 곳에서 공연을 계속해 나갔고, 드디어 EMI와 계약하는 쾌거! 를 이룩한다. 물론 첫 싱글인 “Anarchy in the U.K” 를 발매한 후 머지 않아 ‘짤리기는’ 하지만, 곧 Virgin과 계약하며 그 활동을 이어 나간다. 중간에 A&M과 계약하긴 했지만 6일만에 다시 짤리는 바람에, 그건 넘어가도록 하자.(재미있는 건 이들이 짤린 이유가, 당시 A&M 소속 뮤지션들의 반발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가히 이들이 당시 가져 온 센세이션을 짐작할 수 있다) 77년 10월에는 드디어 이들의 데뷔작(이자 정규 앨범으로는 유일작)인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 가 공개되었고, 앨범은 11월 12일, 예전에 우리 어머니들도 스타들에게 열광하셨다는 증거로서 자주 얘기되는, 그 클리프 리차드를 밀어내고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하기까지 했다. 바로 저 오른쪽의, 참 대충 만든 것처럼 생긴 앨범이 말이다.

Sex Pistols - Anarchy in the U.K


Sex Pistols - God Save the Qu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