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주말드라마 <애정만만세>의 변춘남(박인환)은 매회 앞치마를 두르고 나온다. 미용실을 하면서 돈을 번 아내는 현재 고급 스파를 운영하면서 몇 채의 빌딩을 소유하고 있다. 촌스러운 이름(박말년)을 크리스탈 박으로 바꾸고 사업에만 몰두한다. 자연스럽게 집안일은 변춘남의 몫이 됐다. 매일 아침 아내와 철없는 딸(변정수)과 사위 가족에게 아침상을 차려주는 건 변춘남이다. 아내를 위해 한약도 달이고, 속옷도 다려준다. 아내가 엉터리 영어로 큰소리를 치면 변춘남의 목소리가 점점 쪼그라든다. 30년 군인생활을 하다 전역해, 네 딸들을 구보 훈련시키던 아버지(드라마 <소문난 칠공주>의 나양팔 역)는 이미 옛날 일이다.
(왼쪽) MBC <애정만만세> |MBC 제공 (오른쪽) SBS <내 사랑 내 곁에> |SBS 제공
TV 속 아버지들이 앞치마를 두르는 일이 잦아졌다. 신세대 아빠가 아니라 중년의 아버지의 변화라는 점이 흥미롭다.
또 다른 주말드라마 <내 사랑 내 곁에>(SBS)에서는 남자주인공 이소룡의 아버지 이만수(김명국)가 살림을 한다. 이만수가 대기업에 다닐 때는 큰소리도 꽤 쳤으나 명예퇴직 후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됐다. 그렇다고 어깨 축 처진 가장으로 그려지는 건 아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것보다 집안 식구들을 위해 요리하고 집안 꾸미는 게 신난다”면서 정성스럽게 밥상을 차린다. 식구들도 아버지의 요리 솜씨에 매번 감탄한다. 덕분에 김명국은 매회 화려한 앞치마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1990년대 초·중반 이후 ‘딩크족(Double Income, No Kids·자녀를 갖지 않는 맞벌이 부부)’이 등장하면서 맞벌이나 가사 분담은 자연스럽게 드라마로 흡수됐다. 트렌디 드라마 속 젊은 남편들의 앞치마를 홈드라마로 분류되는 주말극의 중년 남편들이 이어받게 된 것이다.
MBC <불굴의 며느리> | MBC 제공
역시 홈드라마로 분류되는 MBC 일일드라마 <불굴의 며느리>는 300년 전통을 가진 종가 ‘만월당’의 며느리들이 주인공이다. 드라마 속 장석남(이영하)은 만월당 근처에 커피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는 노신사 바리스타. 앞치마를 두르고 매일 커피를 뽑는 그는 만월당의 종부인 차혜자(김보연)와 만월당의 막내딸 김금실(임예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전통을 중시하는 만월당의 여인들 역시 앞치마 두른 남자를 마음에 품었다.
드라마 주시청층인 40~50대 여성을 잡기 위해 이들의 판타지나 로망을 자극하는 설정이 더해지게 마련이다. 남편이 집안일을 하며 내조하고, 여성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슈퍼맘’이 되는 건 이들이 꿈꾸는 일일 것이다. 또 중년 여성의 취업률이 높아진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는 2011년도 초·중·고 교과서에 여성 차별 인식을 조장하거나 인권 가치에 맞지 않는 내용이 다수 확인됐다고 밝혔다. 초등학교 실과 등 여러 과목에서 가사나 양육 장면의 삽화와 사진에 여성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실을 예로 들며 “어린이들에게 가사와 양육은 여성의 몫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게 하거나 여성, 남성의 일이 따로 있다는 성차별 인식을 갖게 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교과서는 아직 ‘<사랑이 뭐길래>(1991)의 대발이 아버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TV 드라마 속 아버지들은 훌쩍 앞서가고 있다. 아마 드라마가 교과서보다 앞서가는, 유일한 풍경일 것이다.
<박은경 경향신문 엔터테인먼트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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