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세이브 아워 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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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세이브 아워 시네마

대학에서 영화를 가르친다. 학기 초가 되면 새로 만난 학생들에게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진다. “영화란 무엇인가?” 답은 다양하다. 세계를 볼 수 있는 창, 협업, 종합예술, 상품 등등. 누군가는 “영화는 물”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컵을 감독이라고 한다면, 어떤 컵에 담기느냐에 따라 다른 모양이 된다는 의미다. 각자의 답이 이처럼 달라지는 건, 영화는 물론이고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반영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날아간 스카프다.” 학생 N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토드 헤인즈의 <파 프롬 헤븐>(2002)의 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설명했다. 주인공 케이시의 스카프가 바람에 날려 2층집 지붕을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파 프롬 헤븐>은 더글러스 서크의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1955)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에서 남편과 사별한 중년 여성 캐리는 젊은 정원사 론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연상연하 커플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관계를 포기한다. 영화의 끝에 캐리는 결국 론에게 돌아간다. 론은 크게 다쳐 누워 있는 상태다.

 

론은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영화는 분명한 답을 주지 않지만, 페미니스트 평론가들은 마지막 장면을 비극이라고 해석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중년 여성은 ‘돌보는 자’로서만, 그러니까 ‘어머니’의 위치에서만 젊은 남성과 함께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여성은 그야말로 “천국(시대의 도덕률)이 허락한” 범위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

 

2002년, 토드 헤인즈는 이 작품을 미국 사회의 가부장제와 동성애 혐오,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영화로 다시 쓴다. 그리고 편견에 쌓인 ‘도덕률’이야말로 “파 프롬 헤븐(Far from Heaven)”, 즉 천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한다.

 

백인 중산층 커플인 케이시와 프랭크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소문난 모범 부부다. 하지만 프랭크는 동성애자고, 케이시는 우울하다. 어느 날, 아끼는 스카프가 바람에 날아가자, 케이시는 스카프를 찾으러 뒷마당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흑인 정원사 레이몬드와 마주친다. 그렇게 친구가 된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게 되지만, 때는 1957년 미국. 흑백분리정책이 여전하던 그 시절에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의 우정은 사회적 죄가 되고, 혐오범죄의 타깃이 된다.

 

케이시의 아름다운 2층집은 미국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상징한다. 그 집은 자신의 성적지향을 부정해야 했던 프랭크의 비극과 남편의 외도에도 ‘여성으로서의 본분’을 다 해야 했던 케이시의 불행을 자양분으로 삼아야만 유지된다. 물론 인종주의가 초래한 차별과 폭력 속에서 어떻게든 버텨야 했던 레이몬드의 고통도 함께.

 

N은 설명했다. “날아가는 스카프가 케이시를 화려한 집의 뒤편, 억압된 이면으로 인도한다.” 그처럼 영화 역시 관객을 보지 못했던 세계, 혹은 외면했던 세계로 이끈다. 여기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영화는 매끄러운 표면 아래 놓여 있는 부당함을 폭로한다. 동시에 사회의 지배적인 도덕률이 허락하지 않는 내밀한 욕망 역시 만나게 해준다. 피부색만으로 레이몬드를 침입자로 여겼던 케이시가, 결국 그를 인간이자 남자로서 ‘다시 만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코로나19로 극장가를 비롯해 영화계가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독립영화계에서는 영화에 대한 애정을 서로 나누고 독립영화관와 예술영화관을 찾기를 권유하는 ‘세이브 아워 시네마(#SaveOurCinema)’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서 영화에 대해 돌아보게 됐다. “영화란 스카프”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 것도 그 덕분이다.

 

나에게 영화란 언제나 ‘사회가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들을 의심하며, 익숙하지 않은 다른 쾌락을 찾아가는 도전의 공간’이었다. 당신에겐 어떠한가? #SaveOurCinema.

 

<손희정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