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희의 미디어큐비즘] 장준혁의 욕망과 김탁구의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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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정준희의 미디어큐비즘] 장준혁의 욕망과 김탁구의 용기

문자의 시대는 가고 이미지의 시대, 멀티미디어 시대가 왔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읽기'의 과제는 끊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넘쳐나는 '문화'의 홍수 속에서 '대중'들은 '대중문화'에 대해 끊임없이 '읽기'를 시도해야 합니다. TV도 음악도 광고도, 모두 우리를 즐겁게 하는 동시에 때로는 말초적인 감성으로 우리를 자극하고 속이지요. 그러면서도 때로는 '대중문화'라 평가절하할 수 없는 깊이와 철학으로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곤 합니다.

<정준희의 공중 조망>은 이제는 현대인들 모두를 둘러싼 '환경'이 되다시피 한 TV를 비롯해 대중문화의 단면들을 포착해 그 행간까지 읽게 해주는 길잡이입니다.
정준희님(junehee.jung@gmail.com)은 서울대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문화산업과 미디어제도에 관해 공부했습니다. 미디어제도론과 방송정책을 연구하고 있고 국민대, 광운대, 충남대, 서울대 등에 출강하여 대중문화론, 미디어이론, 방송이론 분야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영국 역사와 문화적 특성을 소개하는 청소년 교양서 <전통을 지켜 새것을 만드는 나라 영국 이야기>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2007년에 방영된 MBC 드라마 <하얀거탑>의 매력은 복잡하고도 모호한 선악구도에 있었다.

물론 캐릭터간 대립의 양상 자체는 선명하고 단순했다. 권력을 가진 자는 비열했고, 권력을 갖고 싶은 자는 탐욕스러웠다. 의료사고를 당한 힘없는 환자의 진실은 아주 쉽게 파묻혔으며, 내부고발자는 침묵을 지키지 않은 대가로 인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시청자들을 매료시켰던 인물은 선한 의사 최도영이 아니라 악한 의사 장준혁이었다. 사람들은 장준혁이 패배하길 바라면서도 장준혁에게 애착을 느꼈다. 단지 그가 불쌍하게 죽어서 안쓰러웠던 것이 아니라, 그가 지닌 실력과 욕망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를 사랑했다.


나는 사람들의 그런 애착이 불편했다. 장준혁이라는 복잡한 캐릭터를 절묘하게 다루어낸 솜씨와, 고전적 선악구도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내러티브적 성취에 동감했던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인간적 이해가 그의 행동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흐리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었다. 그가 출세를 위해 택한 일련의 행동들은 의사라는 직업이 하나의 전문직으로서 존립하는 데 필수적인 규범을 어겼고, 자신의 몰락을 막기 위해 타인의 삶을 목적의식적으로 짓밟는 것이었다.





알고 보면 의사들의 직업윤리란 다 허울일 뿐이고, 따지고 보면 사회란 게 어차피 그렇게 굴러가는 법이라고?


무슨 소리. 근대사회는 비록 도덕적이지는 못해도 최소한 윤리적일 수는 있다. 아니, 윤리적일 때에만 존립할 수 있다.


돈 없어 배곯는 이에게 공짜로 빵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빵집 주인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을지언정) 윤리적으로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농약 친 밀가루 빵을 유기농 빵으로 속여 팔았다면 문제가 다르다. 우리가 빵을 살 때마다 성분 검사를 하지 않는 것은 빵집 주인이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전제를 우리는 신뢰라고 부르며, 신뢰를 지탱하는 것이 바로 윤리이다. 모 통신사의 광고 카피처럼 “다 그래”를 뒤집어야 근대사회를 움직이는 최소한의 게임 규칙이 성립되는 법이다.


이쯤 되면 단골처럼 등장하는 반응 중의 하나가 “그렇게 따지지 좀 마라!”다.

“영화는 영화다” 그러니 드라마를 그냥 드라마로 보자는 식의 대응 역시 빠지지 않는 양념이다, 허나 그런 사람들 대다수가 오히려 장준혁에게서 자신을 보고, 대형 병원을 움직이는 거대한 권력과 그를 좇는 욕망에 자신의 경험을 투사한다.

사람들이 <하얀거탑>에 그토록 매료되었던 건 오히려 드라마를 드라마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중매체는 현실의 반영이거나 왜곡이라는 고전적인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지만, 특정 시기를 관통하는 ‘표본적인’ 메시지나 이야기구조라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을 트렌드라고 부르건 현실의 재현(representation)이라고 부르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이야기꺼리가 되는 대중매체 생산물에는 당대의 정서구조와 조응하는 바가 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당시는 “반칙하지 않는 사회”를 주장하던 노무현 정부의 막바지였고, “도덕성보다는 능력”이라는 보수매체들의 기묘한 담론이 암묵적인 공감을 얻어가던 때였다.


그리고 그해 말,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능력은 있어 보이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다. 일각에서 물고 늘어진 반칙 혐의는 끝까지 입증되지 않았다.

솔직히, 당시의 국민들 상당수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묵인했거나 혹여 반칙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걸 문제 삼고 싶지는 않았던 것 아닐까?


그로부터 3년 후, 사람들은 <제빵왕 김탁구>에 열광하고 있다. 장준혁의 악마적이지만 인간적인 욕망에 매료되었던 사람들이, 오로지 실력과 의리를 앞세우는 김탁구의 진실성에 매력을 느낀다.


물론 둘 사이에는 분명히 공통점도 있다. 그들은 모두 천재적인 능력을 갖고 있고, 치열한 토력을 통해 실력을 입증하며, 불우한 배경을 딛고 자기 분야에서의 성취를 향해 저돌적으로 나아간다.





선악구도 역시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비열한 악행에도 이해할만한 요소는 있다. 하지만 김탁구는 단 한 번도 정당하지 않은 길을 걷지 않는다. 우직하면서도 유연하고, 진정성을 갖고 있기에 성공하며, 붙잡을 수도 있었던 권력과 금력을 던진 채 직업규범에 충실한 “빵쟁이”로 돌아간다.


<제빵왕 김탁구>만일까.


<동이> 역시 그렇다. 천민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실력과 진성성만으로 역사의 행로를 바꾸는 정직한 인물에게 시청자들은 공감과 애정을 보낸다.

선악구도는 조금 더 단순하고 고전적이어서, 장희빈 측은 분명히 나쁘고 동이 측은 때로 고지식하게 올바르다. 그럼에도, 어떻든 장희빈은 악의 화신이라기보다는 이해할만한 욕망을 가진 인간일 뿐이다. 동이 역시 막연히 정직하기만 한 게 아니라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 노회한 지략과 정치력 역시 지니고 있다.


이 또한 우연인지는 몰라도, 난데없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학술서가 날개 돋친 듯이 팔리고, 이명박 정부의 집권 후기 구상인 “공정사회”는 그것을 내건 당사자가 당혹스러워 할 만큼 진보적인 색채를 띠고 확산 중이다.


마냥 정직할 수는 없게 만드는 현실의 압박에 체념하고, 무기력한 정의보다는 마키아벨리적 생존 의지와 능력에 공감하던 사람들이 이제 정말 ‘정직한 사람이 보상받는 사회’를 열망하기 시작한 것일까? 아니면 단지 ‘좌절된 기대’로 인한 피로감이 또 다른 형태의 반항적 기대를 낳는 과정에 불과한 것일까.



이명박 대통령이 9월 5일  ‘공정사회 구현을 위한 국정운영 방향’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경향신문




김탁구가 어떤 식으로든 ‘성공’하지 못했다면, 김탁구의 진정성이 한승재와 서인숙의 거짓에 패배하고 구마준을 돌아 세우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역사가 미리 말해주는 것과는 달리, 정직한 동이가 간교한 장희빈에게 지고, 총명하고 우애 깊은 연잉군이 결국 영조가 될 수 없는 것으로 그려졌다면 또 어땠을까?


비록 결과적으로 패배했다고 하더라도, 동기와 행위가 정당하고 진실했기에 그 패배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