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희의 미디어큐비즘] 누가 허각을 청와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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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정준희의 미디어큐비즘] 누가 허각을 청와대에...

슈스케 우승자 허각이 청와대에 갔다. 턱시도를 입고 나비 넥타이를 맨 그는 청와대가 "멋진 곳이었"다며 트위터에 '방문 후기'도 남겼다.
별안간 무슨 일이었을까 몹시 궁금해진다. 낚시질 당하는 셈 치고, 클릭.

오 이런
! 방통위 한 해 업무보고 자리였단다미디어 규제와 정책을 담당하는 방통위와, 청와대의 공정사회와, 환풍기 수리공 출신 가수 허각. 선뜻 연결되지 않는 이 세 꼭지점을 이어 '공정사회 삼각지대'를 만들어내는 이 놀라운 상상력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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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정부가 들어 선 이후, 한국 사회의 구석구석에 촌스러움이 배가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좀 더
'공정하게' 평가하자면, 지난 정부들이라고 해서 훨씬 더 세련됐던 것 같진 않다. 김대중 대통령이 영어로 유엔 연설을 해서, 노무현 대통령이 최초로 영국에 국빈 방문을 해서 한국이란 나라의 품격이 엄청나게 높아진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긴 해도
, 이 복고풍 정부의 정치문화적 감각에는 좀 심한 구석이 있다. G20 정상회의 한다고 "우리 선조들은 손님이 오면 대문 앞을 쓸었다"는 식의 홍보에 돈을 쏟아 붓다니.
새마을운동 정신으로 무장하면 21세기 선진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건지. 문화산업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일으켜 세우겠다는 건지. 복고도 하나의 패션이긴 하지만, 이건 뭐, 스노우진 다시 유행한다고 장롱 속 20년 전 청바지를 꺼내입는 격이다.

게다가 이런 복고적 촌스러움은 기묘한 상상력으로 더욱 증폭된다
. 강바닥 파내고, 물길 바꾸고, 강둑에 콘크리트 바르는 사업이 4대강 '살리기'라는 건 대체 어떤 천재의 머리에서 나온 조어법인지.
사례를 들자면 실로 차고 넘친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겠다며 처칠의 2차대전 전시내각을 본떠 지하 벙커에서 국정회의를 하는 발상이라든가, 국민과 소통하겠다고 이번엔 또 루스벨트를 본떠 대통령이 직접 라디오 방송을 해보겠다는 아이디어까지. 이쯤 되면 기묘함을 넘어 사뭇 모종의 독특한 미학이 느껴지기조차 한다. 복고풍 정부에 키치풍 정책이라니.

다시
, 방통위 극본 청와대 연출의 단막극 <허각 청와대에 가다>로 돌아가 보자.

국가기구의 한 해 업무보고가 누군가의 표현처럼
"큰집에 불려가 쪼인트 까이는" 형국일 필요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서로 등 토닥여주며 훈훈한 미담과 덕담을 나누는 자리가 된들 딱히 나쁠 건 없다.

어차피 정치나 국정운영이라는 것 역시 다분히
'쇼비즈니스'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법. 방통위 업무보고 자리에서 알맹이 있는 이야기 하나 오고가지 않았다고 투덜대고 싶지도 않다. 턱시도 입고 청와대에서 저녁 한 끼 얻어먹었다 해서 허각이 욕먹을 이유 역시 없다. 그는 그저 들러리였을 뿐이고, 그 또한 모르지 않았을 게다.




허각이 조금 오버했구나 생각한 건 이 부분이다.

그는 자신이
공정사회에 맞게 혜택을 본 사람"이라며 대통령께서 공정한 사회를 많이 강조해 주시고 공정한 사회가 이슈인데 내가 생각하는 공정사회라는 건 꿈이 있는 사람에게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주는 것이며, 노력하면 기회가 오는 사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단다.

따지고 보면 사실 관계가 잘못된 건 없다
. 공정사회에 대한 그의 견해 역시 수용할만하다. 대통령이 공정사회를 강조해준 덕에 자신이 혜택을 본 것이라는 주장처럼 오해될 수도 있다는 점 빼곤 말이다.

이 장면에서 문득
5공화국 시절을 떠올렸다.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따거나 성공적으로 방어한 권투선수에게 당시 전두환은 친히 전화를 걸어 그 공적을 '치하'했다. 선수들은 대개 차려자세나 부동자세로 서서 마치 군인이 장성에게 관등성명을 대듯 이렇게 외치곤 했다.

"
각하! 모든 게 각하께서 격려해주신 덕분입니다!"

청와대가 링아나운서에게 축전을 전달한 것도 아니고
, 허각이 숨을 헐떡이며 각하를 찬양한 것도 아니지만, 솔직히 2010년의 방통위 업무보고 자리와 1980년대의 장충체유관 특설링이, 시대를 뛰어넘어 이렇게 연결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어지간히 배짱이 좋거나 대단히 성격이 모난 사람이 아니고서는
, 그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주최측의 귀에 거슬릴 말을 꺼내는 경우란 없다. 결국 허각의 입에서 뜬금없이 공정사회 멘트가 나온 것은 최소한 청와대나 방통위가 그에게서 그런 종류의 발언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게 정말 작가가 써준 대본에 의한 거였는지 아니면 허각이라는 '배우'의 애드립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방통위 한 해 업무보고에서 생뚱맞게 공정사회가 튀어 나오고, "각계각층의 의견을 경청"하기 위해 허각을 초대해서 마이크를 쥐어줬다는 것부터가 한 편의 시트콤이다.




차라리 이 웃지못할 희극이
, 종종 그랬듯, 즉흥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해프닝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큰 웃음 한 번 주려고 이번 이벤트를 기획한 게 아니라는 징후가 구석구석에서 발견된다
. 예컨대 지난 10월말 조계종을 방문한 김황식 총리가 자승 총무원장과 나눈 대화 속에서도 슈스케와 공정사회가 등장한다.
당시 총리는 "우승 과정을 보고 받고 공정한 사회 구현과 서민정책이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챙겨 보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아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워낙 심오하게 어법이 뒤섞인 문장이라 제대로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이를테면, 슈스케 우승 과정을 분석하면 공정사회를 위한 서민정책이 도출될 수 있다는 얘기인 건가?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정치나 국정운영에도 분명 쇼비즈니스적인 요소가 있다. 모든 종류의 국정홍보, 모든 종류의 공식적 이벤트는 일종의 미디어 '의례(ritual)'이며, 잘 짜인 시나리오와 매력적인 퍼스낼리티와 세련된 연출력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하나의 의례인 한, 진실과 허구라는 프레임이 당장 필요하진 않다. 다만 짜임새 있는 드라마와 허술한 드라마, 설득력 있는 이야기와 어이 없는 실소를 자아내는 이야기가 있을 따름이다.

물론 연출 기법이 부족한 드라마를 메울 수 없고
, 진심 없이 설득력은 보장되지 않는다. 우리가 현 정부의 연속된 헛발길질 앞에서 절망하는 건, 재미도 없고 그렇다고 감동도 없을 뿐 아니라 시쳇말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상황이 수시로 연출되기 때문이다.

능력이 없으면 도덕성이라도 있어야지
, 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럼, 애시당초 도덕성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니 때깔나는 능력이라도 있어야지, 라고 되물을 때, 이 도무지 몰입이 안 되는 드라마만 선뵈는 정부는 과연 뭐라 답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