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달콤한 인생’의 카리스마 넘치는 보스와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의 마음 넓은 아버지 사이에는 결코 하나의 얼굴로 담아낼 수 없는 거대한 간극이 존재한다. 드라마 ‘태조 왕건’의 광기 어린 궁예와 드라마 ‘아이리스’의 알 수 없는 인물 백산 사이에는 그 배경이 되는 시간보다 더 멀고 먼 강이 흐른다. 하지만 이 모든 인생을 타인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 눈빛을 가진 배우는 있다. 그것은 아마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탄탄한 뿌리에서 비롯된 힘일 것이다. 언제나 한 사람의 인생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배우 김영철은, 어떤 역할을 입어도 숨겨지지 않는 ‘멋’을 갖춘 그런 남자다. |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희끗하게 센 머리카락과 시간의 더께가 진하게 내려앉은 얼굴,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이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 분명 세월이 비껴가지는 않은 듯한데, 카메라 앞에 선 김영철(61)에게서는 여전한 남자의 욕망과 형형한 결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별다른 장식이나 덧칠 없이도, 그저 팔짱을 낀 채로 무심하게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프레임은 어떤 이야기로 가득 찼다. 공간을 가득 메우는 그 존재감의 원천은 아마도 그가 가진 중후한 분위기와 진중한 무게에서 비롯되는 것 같았다. 한 컷 한 컷, 촬영이 진행될수록 더더욱 그런 확신이 들었다.
“주제에 맞게 뭔가 이야기를 간직한 멋진 남자의 모습이 느껴졌으면 좋겠는데, 잘 표현이 됐나 모르겠네요. 자주 응하진 않지만 이런 화보 촬영도 나름의 재미가 있는 것 같아요. 사진 예술이 주는 미묘한 특성이 있거든요. 정지된 시간을 통해서 나를 옮겨 담는 묘미랄까요. 간혹 스스로 느끼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하는 기쁨도 있고요. 아직도 내가 모르는 얼굴이 내 안에 숨어 있더라고요.”
올해로 연기 경력 39년, 정통 사극부터 현대물까지 시대를 넘나들며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해왔지만 아직도 끄집어내지 못한 모습이 남아 있다는 그는 지금도 끊임없이 그 얼굴들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현재 한창 촬영 중인 KBS-2TV 드라마 ‘아이리스2’에서도 그렇다. 이제는 조금은 수월하게, 편하게 간다고 해도 누구 하나 뭐랄 사람도 없지만 좀 더 맡은 인물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 어떤 날은 밤잠을 설쳐가며 대본을 파고들기도 한다.
“내일은 제가 맡은 인물의 고뇌와 아픔이 드러나는 중요한 장면을 찍는 날이라 컨디션 관리를 잘해야 해요. 평범한 일상 속 인물이 아니기에 더욱 신경이 쓰여요. 그가 살아온 인생, 믿었던 가치관, 겪었던 경험들이 시청자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전달이 되려면 좀 더 세심하게 표현해야 해요. 1편에 이어 후속편으로 이어지는 인물이라 연기하기 쉽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처해진 상황과 흘러가는 이야기가 다르기 때문에 눈빛이라든지 연기의 톤이 다를 수밖에 없어요. 그건 어떤 작품이든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많은 작품을 했고 연기 경력을 쌓았다고 해도 모든 작품은 고유한 이야기를 품고 있거든요. 꼭꼭 잘 씹어서 소화시키는 배우의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죠.”
그는 결국 모든 것이 진정성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각각의 인물에 맞게끔 진솔한 접근을 해야 시청자가 공감할 수 있는 연기가 탄생하는 거라고. 배우가 인물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언저리에서만 맴돈다면 대중은 단박에 알아채고 몰입을 거둔다는 것이 그가 오랜 세월 경험으로 체득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연기는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해야 하죠. 배우가 인물에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담았는지가 가장 중요해요. 마음을 담지 않고 머리로 연기하다 보면 결국 실제 내가 고스란히 나오잖아요. 머리로 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에는 소멸되고 바스러져버려요. 한계가 있는 거죠. 언제나 마음으로 김영철이 아닌 그 인물이 나올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해 생각하고 또 소통해야 해요. 설렁설렁 넘기고 딴짓해서는 결국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요. 그냥 ‘한 작품 했구나’ 하고 마는 거지. 저는 그렇게 단순히 출연 편수만 채우고 싶지는 않거든요. 스스로 만족하고 재미를 느끼면서 계속 연기하고 싶어요.”
아버지와 남자 사이
배우들은 물론이고 일상 속에서도 나이 들수록 멋있어지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육체에 한 줄씩 나이테가 쌓인다는 것은 반대로 그만큼 하나씩의 매력을 상실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마치 사람의 몸은 한계치가 설정되어 있어서 연륜과 깊이를 채워 넣으려면 대신 개성과 섹시함을 덜어내야 한다는 법칙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점에서 볼 때 김영철은 예외가 아닐까 싶다. 설령 그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혹은 훌륭한 배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는 분명 보기 드물게 ‘멋진’ 중년 남자라는 것이다.
“글쎄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특히 배우는 자신이 지나온 세월과 역사를 얼굴과 몸에 고스란히 새기는 것 같아요. 젊었을 때는 그게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거죠. 그래서 항상 생각도 생활도 책임질 수 있는지를 떠올리며 만들어왔던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의 삶과 모습을 통해 깨닫고 배운 것도 있고요. 물론 제게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고 방황하던 때가 있었죠. 초조하고 불안하고, 쫓기고 욕심내기도 하고. 하지만 한 가지,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자존심이 스스로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에너지가 되고 믿음이 되거든요.”
그는 두 아들에게 틈만 나면 하는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바로 ‘혼자 있을 때 신사여야 한다’라는 것.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들여다봤을 때 스스로에게 만족할 수 있을 만큼 떳떳하고 멋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풀어지지 않고, 자신을 세우고 지키는 자세. 중심이 굳건한 남자는 결코 추해지거나 뒷걸음치지 않기 때문이다.
“멋지게 나이 드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고들 하죠?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자존심을 버리기 때문이에요. 거친 표현을 하나 쓰자면 어떤 자리에 있든 흔히 말하는 ‘가오’가 없다면 전부를 잃어버리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제가 그나마 아직 멋있는 역할이 어울린다고 하는 건 ‘나에 대한 자존심’을 잃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일 거예요. 일이든 인간관계든 적당히 타협하거나 용서하지 않고 지켜야 하는 것은 반드시 지키려고 해요.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도 계속 스스로를 세우며 떳떳하게 살 거예요.”
그런 ‘멋’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까. 김영철은 동시대 연기자들에 비해 폭넓은 캐릭터를 소화해낼 수 있는 흔치 않은 배우다. 소소한 일상 속 동네 아저씨부터 누아르의 주인공까지, 그에게는 ‘아버지’와 ‘남자’가 모두 꼭 맞춘 듯 잘 어울린다.
“우리 나이 또래에 활발하게 활동하는 남자 배우가 거의 없어요. 최근 제게 목표가 하나 생겼어요. 최불암 선배 이후 한국의 아버지상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고뇌하고 망설이고 외롭고, 하지만 꿋꿋한 이 시대의 아버지요. 제가 그런 남자의 모습을 담아내고 싶어요. 누구나 인생의 전성기가 있겠지요. 저는 아직 그 시기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아직 만족을 느낀 적이 없거든요.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주변 평가가 좋다고 해서 최고가 되는 건 아닐 거예요. 지금은 모르지만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깨닫게 되겠지요. 자존심 버리지 않고 후회하지 않고 살아온 내 인생 모든 날들이 나의 전성기였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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