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에세이 펴낸 김태원의 음악과 인생, 그리고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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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펴낸 김태원의 음악과 인생, 그리고 아내

최근 몇 년간 김태원의 인생은 반전(反轉)의 연속이었다. KBS-2TV ‘남자의 자격’에서 ‘국민 할매’라는 대중적 칭호를 얻었고 ‘청춘 합창단’에서는 카리스마 있는 지휘자로 변신했다. 오디션 프로그램 ‘위태한 탄생’에서는 날카로운 독설 대신 용기를 북돋워주는 말로 멘티들을 어루만져 ‘국민 멘토’로 추앙받기도 했다. “죽을 때까지 정체를 숨겨야 한다”라는 자신의 말처럼 그는 반전을 거듭하고 있는 중이다. 짙은 선글라스 너머로 또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다.

‘오즈의 마법사’를 찾는 이들을 위한 책
 

‘국민 할매’의 트레이드마크인 올백으로 묶어 넘긴 머리와 까만색 선글라스, 미소 짓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에서는 카리스마와 여유가 느껴졌다. 담배를 피워도 되는지 묻는 첫인사에서도. 부활 전국 투어 콘서트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는 얼마 전 「우연에서 기적으로」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기억이 닿는 아주 오래전부터 최근까지,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다. 250여 쪽의 페이지 안에는 굴곡 많았던 그의 인생이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다. 책을 읽지 않는다는 그의 또 한 번의 반전이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김태원 우리나라 마흔일곱 살 성인 남자들 표준에 살짝 못 미치는 정도입니다. 그동안 제 몸에다 한 짓이 있다 보니 이 정도면 만족해요(웃음). 신체 나이는 55세 정도 될까요?

선글라스는 평소에도 쓰시나요?
 

김태원
 제가 폐쇄공포증, 대인기피증에 우울증까지 앓았어요. 부활 1집이 나온 1986년까지도 대인기피증이 심해서 사람을 만나면 눈을 못 쳐다봤습니다. 자폐아들이 사람의 눈을 잘 안 보거든요. 저도 거의 자폐 수준이었다고 보시면 돼요. 그러다 제가 사람이 보고 싶어서 1990년대 이후부터는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상대방의 동공을 주시할 때 그 사람이 굉장히 불편해한다는 걸 알았어요. 그때부터 선글라스를 쓰기 시작한 거예요. 지금 제 눈이 안 보이시겠지만 저는 계속 보고 있습니다(웃음). 방송할 때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자 하니까 선글라스를 벗었습니다. ‘청춘합창단’을 지휘하며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칠 때의 그 감동은 대단해요. 저같이 어린놈이 그렇게 많은 삶을 사신 분들과 눈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무한한 영광이었습니다.

언젠가 책을 내실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내셨습니다.
김태원
 1년 정도 준비했습니다. 책을 써본 적도 없고 또 원래 읽지를 않는 사람이라 처음엔 버거웠습니다. 부활을 사랑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전국 투어를 계속했어요. 이동하는 차 안에서 주로 썼습니다. 차 안에서 보통 다 잠을 자는데 저는 잘 못 자요. 슬픈 병이 있는 사람이라. 그렇게 쓰기 시작했는데 책을 쓴다는 게 참 행복하더군요. 제가 일상에서 이야기하는 한두 줄의 문장은 보통 서너 페이지 정도의 분량을 함축한 것이거든요. 그렇게 두어 줄로 함축해서 쓰던 문장들을 10페이지로 만드는, 그런 작업을 했죠. 그동안 일기를 썼던 것도 도움이 됐어요. 전 형식적이거나 진부하게 일기를 쓰지 않습니다. 딱 그날 느낀 것을 함축해서 써요.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기억을 쫓고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재미있는 작업이었습니다.

지금 책을 쓰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김태원
 방송에서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제가 어린 시절 그렇게 찾아 헤매던 멘토는 결국 ‘오즈의 마법사’처럼 실재가 아니었어요. 저도 못 만나고 살았죠. 결론은 제가 멘토가 돼서 후배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줘야겠다는 것이었어요. 저 같은 사람이 책을 쓰면 재미있을 거예요. 왜냐하면 책을 안 보는 사람이 썼으니까. 저와 같이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책을 볼 수 있는 작은 실마리가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말이라도 시적인 표현을 자주 하십니다. 보통 사람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도 많이 쓰시고요. 그런 시적인 표현은 어떻게 나오는 건가요?
김태원
 단어 하나하나를 생성시킬 때 마치 알을 품어 부화하듯이 해요. 예를 들어 ‘아름다워’라는 단어가 있잖아요. 그 4음절을 항상 마음속에 두고 있어요. 혼잣말을 할 때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자주 씁니다. 그 단어의 의미에 대해 무척이나 깊이 생각을 하고 써왔기 때문에 그 말이 입에서 나왔을 때 자연스러워져요. 갑작스럽게 빌려 쓴 말이 아닌 내 안에서 나온 내 것이 된 거죠.

오랜 기간 수행을 해온 것 같은 느낌입니다.
김태원
 제가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할 것이 고난입니다. 사랑을 논하기 위해서 저 같은 사람이 한 사람쯤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어른임을 주장한 적이 없어요. 제 나이 또래 수많은 사람들이 ‘아, 내가 어른이구나’ 하고 수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제 마음은 열한 살에 머물러 있습니다. 비결은 힘들게 인생을 살면 돼요. 권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웃음). 누군가에게 배반도 당하고 감옥도 다녀오고 정신병원도 다녀오고. 슬픈 영화의 주인공이 되셔야 합니다(웃음).

아이에게 나를 맞추니 행복해졌다
최근 그는 방송을 통해 ‘마음의 병’을 가지고 태어난 아들 우현군의 이야기를 밝힌 적이 있다. 현재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필리핀에 살고 있다. 한국과 필리핀을 오가는 기러기 가족. 한때는 그를 절망에 빠뜨렸던 아이가 이제는 그에게 영감이 되고 있다.

책 제목이 「우연에서 기적으로」입니다. 어떤 의미로 지으셨나요?
 

김태원
 기적을 바라는 이들의 단점이 지금 눈앞에서 기적이 이루어지를 바라는 것이에요. 기적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 우연한 만남이 10년, 20년 후에 기적이 될 수 있어요. 모든 우연은 기적을 가장하고 모든 기적은 우연을 가장합니다. 남들보다 모자랐지만 독특했던 어떤 사람의 인생이 다른 누군가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기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지었어요. 저에게 있어서 이 책의 내용은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드린 겁니다. 수학 공식이나 영어 문장이 아닌 목숨을 걸고 살아낸 제 인생의 모든 정보가 들어 있어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들 우현군이 책 표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가요?
 

김태원 우리 아들이 유일하게 하는 것이 그림이에요. 드럼을 좀 치고요. 지금 열두 살인데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면 무언가를 배울 만한 상황은 아니에요. 한동안 레드 제플린이 합주하는 모습을 그렸어요. 외국 밴드의 공연 실황 보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요새는 꽃인지 무언지 모를 그런 형태의 그림을 많이 그려요. 아들은 제가 평생을 추구해온, 나이가 들어도 순수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의 힌트를 주는 존재예요. 그래서 표지에 아들이 그린 그림을 넣었습니다. 책 제목인 「우연에서 기적으로」가 아들 이름 ‘우현’을 연상시키기도 해요. 제 개인적인 욕심을 조금 섞었죠. 제가 이제 웬만한 사람들은 다 파악을 하는데 우현이는 아직 모르겠어요.

얼마 전 ‘남자의 자격’에서 아들에게 보내는 자작시로 시청자들을 뭉클하게 만드셨습니다. 아들의 장애로 힘든 시간을 겪었다고 고백하셨는데 요즘은 평안해지셨나요?
 

김태원
 저와 제 아내가 그 친구(그는 아들 우현군을 ‘그 친구’라 불렀다)를 저희와 같게 만들려고 10년을 노력했어요. 그동안의 불행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정말 극단의 불행이었어요.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그 궤도가 바뀌었어요. 그 친구를 우리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친구에 맞게 바뀌기로 했어요. 그래서 행복해졌습니다. 처음 아이의 병을 알았을 때의 충격은 어마어마했지만 그로 인해 5, 6년 동안 깊이 사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생각이 들었던 것이, 나는 그마나 밥을 먹고 사는데 정말 어려운 가정에서 그런 아이를 만나면 얼마나 큰 지옥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집사람과 아이들이 있는 필리핀에서도 그런 부모들을 많이 만났어요.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는 부모들도 많습니다. 색으로도 향으로도 맛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에요. 겪지 않고는 몰라요. 제가 음악을 팔아 장애인 학교를 세우겠다는 생각은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된 겁니다.

자녀 교육과 관련해서 부모 의지대로 아이를 끌고 가려고 했을 때는 지옥 같았지만 자녀에게 맡기고 난 후에는 편안해졌다고 하셨습니다. 장애아를 가진 부모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요?
 

김태원
 태어난 나 자신을 분명히 행복하게 살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처럼, 석가모니처럼 고행하듯 아이와 불행한 시간을 같이 보내야만 부모 노릇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 불행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자책하는 것도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운명으로 태어난 아이들이에요. 아이들은 행복합니다. 이루지 못할 것이 없고 하지 못할 게 없어요. 부모로서 아이를 보호해야 하지만 절대로 아이만을 위한 삶을 살며 자신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지 마세요. 단 1초도 말입니다.

살면서 아내가 미소 지을 수 있다면
 

큰딸 서현양이 작곡도 하고 밴드 활동도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가수를 하겠다고 하면 지원하실 생각이 있으세요?
김태원
 아, 질문이 잘못되었습니다. 아이가 음악을 하고 제가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먼저 유도를 했습니다. 여섯 살 때부터 온갖 거짓말을 해가며(웃음) 음악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유도했습니다. 딸아이가 거기에 넘어간 겁니다.

누구보다 힘든 가수생활을 하셨는데 적극 지원하겠다니 의외입니다.
 

김태원
 음악을 하면서 힘든 사건을 겪었던 그 시간들이 제가 사는 이유라는 걸 알았어요. 제가 아무런 사건도 없이 이 인생을 살았다면 얼마나 무의미할까 싶습니다. 저는 그 사건들을 맞이했습니다.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어요. 그렇게 예술가로서 자격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어려움 없이 우연히 노래 하나가 떠서 그걸로 대중적 인기를 얻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도 못하고 소모되어버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고 감사합니다.

뮤지션으로서 서현양을 볼 때 어떤가요? 재능이 있어 보입니까?
 

김태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재능이 있는 인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도에 의해, 또 우연에 의해 생겨나고 발굴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그 증인입니다. 중학교 시절 친구가 통기타를 새로 샀는데 줄을 못 맞추고 있었어요. 친구에게 잘난 척하고 싶어서 내가 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기타를 만지기 시작했고 이와 같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소외받던 아이가, 아무것도 못하던 못난 김태원이 이렇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저를 가르쳤던 담임선생님들께서 아직도 이 김태원이 그 김태원 맞느냐고 물어보신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웃음).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본인에게 아내는 어떤 존재인가요?
 

김태원
 강한 사람이죠.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30년이라는 세월을 저와 함께 살았겠습니까. 결혼이라는 조건을 걸고 만난 것도 아니고 그 30년의 반은 애인으로서 저를 지켰습니다. 지금 아내가 제 카드를 긁어도 되는 이유입니다(웃음). 고3 때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제가 그녀의 첫사랑이라는 걸 한눈에 알았어요. 그리고 전 그 첫사랑을 동화처럼 만들어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만나는 순간 임종하는 곁에 있어줄 거라고 확신한 사람입니다. 마흔여섯인데도 아이 같은 순수함을 가진 사람이에요. 제가 웬만한 말싸움에는 지지 않는 편인데 부부싸움에서는 져요. 순수함은 이길 수가 없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세상의 답을 알고 있던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우리 딸아이도 아내의 그런 순수함을 많이 닮았어요. 집안 내력인 듯합니다.

아내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김태원
 한 5년 전만 해도 인생의 목표가 평생 아내에게 진 빚을 갚는다는 것이었어요. 아직 반도 못 갚았지만 최근에 좀 갚지 않았나 싶습니다. 살면서 아내가 미소 지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 평소에도 사랑한다는 말을 잘합니다. 시집에 있는 시어를 일상의 언어로 써야 해요. 그래야 자기 것이 됩니다.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어떻게 되십니까? 예능 활동도 계속 하실 계획인지요.
 

김태원
 아, 그럼요. 저를 보고 즐거워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전 얼마든지 합니다. 위로하고 들려드리고 싶어요. 혹시 미래의 저를 대중이 외면해도 저는 그동안 고통을 겪은 시간이 길기 때문에 또다시 고통을 겪을 각오가 되어 있어요.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박동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