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래도 지난 한 세기 그리고 지금도 세계 대중문화를 쥐고 흔든 최강국은 미국이다. 미국은 대중흡인력이 높은 음악콘텐츠와 유통 파워를 바탕으로 세계 시장을 미국음악 판으로 만들어놓았다. 유럽 남미 아시아는 물론이고 우리의 아이돌 그룹의 음악도 한국 전통음악이 아닌 미국적인 음악이다. 여기서 미국은 승리한 셈이다. 거의 모든 나라의 대중음악이 미국의 것이거나 미국화된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위용을 떨치고 있는 로큰롤이란 음악이다. 황제라는 칭호를 얻은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꽃핀 로큰롤을 보는 애초의 시선은 그리 따뜻하지 않았다. 몸을 마구 흔들면서 소음을 뿌려대는 못된 애들의 음악이라는 게 기성사회의 인식이었다. ‘10대 비행의 원흉’, ‘백치의 깡패음악’이라는 거친 비난도 등장했다. 하지만 새로운 트렌드에 민감한 10대와 20대는 답답한 시절을 후련하게 뚫어주는 듯한 로큰롤 사운드에 너도나도 쏠려 들어갔다.
당대 미국 행정부는 이를 주시했다. 이 로큰롤이야말로 ‘자유’를 표방한 미국만의 진정한 청춘문화라고 판단한 것이다. 전통과 역사가 부재한 신흥국가라고 유럽으로부터 괄시받던 때, 마땅한 대안이 없었던 미국은 로큰롤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용의주도하게 엘비스 프레슬리와 로큰롤 선풍을 유럽을 비롯한 세계에 수출한다. 귀족문화가 만연한 영국부터가 흑인노예의 블루스에서 발전해온 보잘것없는 로큰롤 붐에 극력 반발한다. 오죽하면 <미국의 음모>라는 책까지 나왔겠는가. 요지는 ‘미국이 싸구려 로큰롤을 가지고 고매한 영국의 청소년들을 오염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우려였겠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만세를 부르고 싶을 만큼 미국의 로큰롤은 세계를 제패하는데 성공했다. 영국은 비틀스가 증명해주듯 로큰롤 대열에 동참했고 소련과 쿠바와 같은 공산진영에서도 젊은 세대는 로큰롤에 속속 흡수되었다. 미국의 힘은 전함과 달러를 넘어 로큰롤과 할리우드 시네마 즉 대중문화 파워였던 것이다. 이유는 하나, 바로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글로벌 청춘이 떼로 열광하면서 그토록 맹위를 떨치던 프랑스의 샹송, 이탈리아의 칸초네는 어느덧 기성세대의 ‘올드’ 음악문법으로 내려앉고 말았다. 특히 비틀스의 밴드문화가 가해지면서 1960년대부터는 팍스아메리카나의 시장파괴력은 확고해졌다.
대중문화의 성패는 젊은 세대의 감성에 닿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음악의 주체가 노년이든 중년이든 청춘들의 감수성과 접점을 마련하지 못하면 결코 트렌드로 발전하지 못한다. 7080이나 8090도 영 제네레이션의 관심 혹은 약간의 동의가 뒷받침하지 않았다면 순간 복고 아니면 어른만의 잔치로 끝났을 것이다. 뚜렷한 흐름으로 상승하려면 젊은이들의 지지와 호감이 있어야 한다.
가수 조용필이 7일 오후 일본 도쿄 국제포럼 공연장에서 열린 자신의 19집 투어콘서트 ‘헬로’에서 열창하고 있다. 사진제공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지난해 조용필의 ‘바운스’ 열풍도 10대와 젊은 층의 성원이 절대적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어른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음원 부문에서 두 곡이나 1위를 차지한 것이 말해준다. 조용필 스스로도 “새로운 나, 또 다른 나를 찾고자 했다!”며 대놓고 젊은 음악 쪽으로 갔다. 최근 중견 가수들 사이에서 모처럼 형성된 ‘한번 해보자’는 활기는 단순히 그때의 음악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젊은 세대와 소통하려는 노력, 지금의 음악문법을 놓치지 않으려는 접근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막 컴백한 이선희는 새 앨범을 만들면서 한창 잘나가는 젊은 작곡 팀 ‘이단옆차기’로부터 ‘동네 한바퀴’라는 곡을 받았다.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선 숙련가가 보여주는 세대균형을 위한 노력이다. 노련한 가수의 ‘영’한 음악에 누리꾼은 우호적 반응을 보인다. 나이든 가수가 음악을 젊고 신선하게 꾸미려는 것을 두고 애들한테 비위나 맞추며 알랑거리는 제스처로 치부해선 곤란하다. 대중음악의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젊은 층에 있고 그들의 반응에 따라 대중성 여부가 결정된다. 주인이 키드라면 모시듯 그들과 소통해야 한다.
임진모 |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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