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칸 국제영화제에선 ‘사건’이 벌어졌다. 그랑프리인 황금종려상이 제인 캠피언 감독의 <피아노>에 돌아간 것이다. 여성 감독이 황금종려상을 안은 것은 사상 최초였다. <패왕별희>의 천카이거 감독과 공동 수상이었지만 빛이 바래지 않았다. 이후 ‘제2의 제인 캠피언’이 나올지가 칸 영화제의 관심사 중 하나가 됐다. 그러나 제2의 캠피언은 24년간 배출되지 않았다. 2015년 아녜스 바르다 감독이 ‘명예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뿐이다.
영화<피아노>의 한 장면.
14일 아침 경향신문 1면 사진의 제목은 ‘82 대 1688’이었다. 제71회 칸 국제영화제에 참가한 여성 영화인 82명이 레드카펫에서 영화계 내 성평등을 요구하며 펼친 퍼포먼스를 담은 사진이다. 경쟁부문 심사위원장 케이트 블란쳇은 외쳤다. “우리는 82명입니다. 1946년 칸 영화제가 시작된 이후 71년 동안 82명의 여성 감독만이 이 계단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남성 감독 1688명이 이 계단을 오를 동안 말이죠.” 혹여 영화감독 가운데 남성이 많아 그렇게 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다. 계산해보자. 해마다 칸의 레드카펫을 밟은 남성 감독은 23.77명, 여성 감독은 1.15명꼴이다. 지난 71년간 활동한 전 세계 영화감독의 성비를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남녀 비율이 20 대 1이기야 하겠는가.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이 지구촌을 휩쓴 올해도 경쟁부문 초청작 21편 중 여성 감독 작품은 3편뿐이다.
미국 할리우드에선 영화계의 여성차별을 ‘유리 천장’에 빗대 ‘셀룰로이드(필름의 재료) 천장’이라 일컫는다. 90년 아카데미 역사상 감독상 후보에 오른 여성은 5명뿐이다. 수상자는 2010년 <허트 로커>의 캐스린 비글로가 유일하다. 한국 현실은 더 척박하다. 영화진흥위원회 자료를 보면 2013~2017년 개봉 한국 영화 중 총제작비 10억원 이상이거나 최대 스크린 수 100개 이상인 상업영화에서 감독이 여성인 작품은 전체의 6.8%에 그쳤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스웨덴과 영국, 호주 등은 인구의 50%가 여성이듯 영화계에도 여성 비율이 50%에 이르러야 한다는 정신 아래 다양한 지원책을 실험 중이다. 한국도 이 같은 실험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경향신문 3월2일자 26면 보도)고 했다. 셀룰로이드 천장을 이대로 놔둘 순 없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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