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의 문이 굳게 닫히고 모든 것이 이대로 영영 멈춰버릴 것만 같았지만, 걱정은 기우였다. 공연의 세계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사라지지 않았다. 닫힌 공연장 문 안에서, 스튜디오에서, 집 안에서 음악가들은 계속해서 공연을 만들어내며 이를 온라인으로 송출하고 있다.
지난 주말만 해도 서울남산국악당은 네이버TV로 혜원·민희의 ‘남창가곡’ 녹화 중계를 선보였고 음반사 도이체그라모폰은 유튜브로 조성진의 독주회를 상영해 많은 시청자를 모았다. 약 2주 전 레이디 가가는 대형 페스티벌 수준의 라인업을 갖춰 의료계 종사자들을 위한 초대형 온라인 자선 콘서트 ‘원 월드: 투게더 앳 홈’을 개최했다.
온라인 공연, 무관객 공연, 공연 녹화중계, 실시간 생중계 등 제각각의 이름과 형태를 지닌 이 반짝이는 콘텐츠들을 작정만 하면 매일매일 무료로 볼 수 있게 됐고 ‘오늘의 온라인 공연’을 소개하는 기사 지면도 등장했다. 인터넷에 아직 열지 않은 선물상자가 가득 찬 것 같은 지금, 모자란 것은 시간뿐이다.
클릭만 하면 인터넷을 표류하는 그 수많은 공연들을 마음껏 즐길 수 있지만 당연히 그걸 다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이 온라인 공연들은 공연 영상기록, 음원, 뮤직비디오라는 유서 깊은 콘텐츠와 한데 뒤섞여 같은 플랫폼 안을 떠돌고 있다. 내가 영원히 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공연들, 듣지 못할 음악들이 무한히 늘어선 광경을 보다보면 인터넷에서 거대한 음반 라이브러리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두근거림과 무력감이 다시 찾아오곤 한다. 영상비평지 ‘오큘로’ 4호에 실린 ‘너무 많은 영화들 앞에서 시네필이 느끼는 당혹스러움과 고민’에서 필자 김보년은 이렇게 썼다. “내 뇌가 수용할 수 있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총량을 고민하게 된다.”
한편 공연이 끝날 무렵에야 링크에 접속했는데 하필 온라인 1회 상영이었을 때면 공연장에 늦게 도착했을 때처럼 좌절감이 밀려온다. 땅을 치고 후회해도 지나간 시간이 돌아오진 않으니 빠른 포기만이 답이지만 온라인 1회 상영을 놓쳤을 땐 그 야속한 상황을 조금 더 오래 곱씹게 된다. 무료였는데, 시간만 맞추면 볼 수 있었는데, 분명 파일이 보관됐을 것이고 얼마든지 재생할 수 있을 텐데 창작자는 왜 1회 상영을 고수했을까, 이걸 정말 ‘공연’이라고 봐야 할까 등 후회와 가정과 질문이 뇌리를 가득 메운다.
온라인 콘텐츠의 경제논리에 의하면 이득과 직결되는 핵심적인 반응 척도가 조회수인 만큼 노출 빈도를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이를 잘 알면서도 1회 상영을 선택했다면, 그건 공연의 일회적 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기록은 얼마든지 재생될 수 있지만 한날한시에 일어난 사건이 똑같이 반복될 수는 없다. 비록 그 온라인 공연이 영상 기록과 변별할 수 없는 형태더라도, 그걸 진정 ‘공연’으로 보자면 그렇다. 내게 공연은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건이었고 내 자리는 객석이라고 믿어왔지만, 지금의 나는 스크린 앞에 앉아 공연 관람의 기쁨을 누린다. 무리 없이 이 변화에 적응해가는 가운데 궁금증들이 떠오른다. 온라인 공연이 영상 기록물이나 뮤직비디오와 완전히 다른, 정말 ‘공연’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장치가 필요할까. 이것은 한시적 유행에 그칠까, 아니면 든든한 새 형식으로 자리 잡을까. 그리고 이 온라인 콘서트의 흐름을 주도하는 자들은 대체로 넉넉한 자본이나 잘 다듬어진 플랫폼을 보유하고 있는 음악가나 기관인 듯한데, 이 전환기에 여유롭게 새 플랫폼으로 이주할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고, 여기서 사라져버릴 음악들은 무엇일까.
<신예슬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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