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특정 다수와의 대면이 가장 두려운 일이 되어가는 요즘, 예술계 창작자들이 제안하는 대안들이 눈에 띈다. 한 작곡가는 관객 없이 음악회를 진행해 추후 기록을 공개하기로 했고, 한 작가는 미술관이 문을 닫은 탓에 전시 중이던 영상 작업을 스트리밍으로 한 차례 선보였다. 조르조 아르마니는 빈 극장을 빌려 관객 없이 패션쇼를 진행해 온라인으로 생중계했다. 낯선 방식은 아니다. 실제 공연과 미디어 기록은 공존하며 서로를 보완해왔고, 나 또한 현장에 가지 못하면 영상이나 스트리밍으로 공연을 본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아무 관객도 없는 현장을 미디어로 보여주기만 한다고 하니, 어쩐지 새삼스럽다.
어떤 공연 현장은 관객 없이는 만들어지기 어렵다. ‘이머시브’ 공연이라 불리는 사례 중에는 관객이 배우와 상호작용하는 또 다른 등장인물이 되거나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다. 관객이 공연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누구를 따라 어디로 이동하느냐에 따라 경험하는 바가 완전히 달라지는 연극 <슬립 노 모어> 같은 경우도 있다. 이런 공연에서 관객은 고정된 자리에서 멀찍이 공연을 바라보는 관망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편 어떤 공연에서 관객은 적극적인, 혹은 소극적인 반응을 건넨다. 무대 위의 공연자가 “소리 질러” 같은 이런저런 요구를 할 때마다 최대한의 음량으로 반응하게 되는 페스티벌 같은 현장도 있다. 쥐 죽은 듯이 있다가 마지막 악장의 마지막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마침내 박수를 보내는 서양음악의 관객은 인내력에서 둘째가라면 서럽다. 관객들이 거의 아무 반응을 하지 않고 공연자와 조용히 교감만 하다가 박수도 찬사도 없이 자리를 뜨며 끝나는 공연도 있다. 현장의 관습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특유의 관객 문화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만큼이나 공연에서만 즐길 수 있는 묘미 중 하나였다.
그리고 대면을 피해야 하는 요즘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관객이 현장에서 사라지는 사례가 하나둘씩 생겨났다. 이 상황에 굴하지 않고 공연을 중단하지 않기 위해 내린 최선의 선택이었겠다. 익명의 관객들과 일회적으로 대면할 기회는 포기했지만, 창작자들은 재생 가능한 공연의 기록물을 성실히 남기고 있다. 어쩌면 공연보다 많은 사람이 볼 가능성이 큰 데다 쓸모도 더 많을 것이다. 이런 소식들을 역시나 미디어로 접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공연이 대체 무엇이었는지를 괜스레 되돌아보게 된다.
음악학 공부를 시작할 무렵, 한 토론 수업에서 난처한 논제들을 다뤘다. 음악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비롯되느냐, ‘한국음악’의 장르적 범주는 무엇이냐, 거친 질문들이 튀어나오는 와중에 학생들의 대단한 관심을 받은 문제가 있었다. 누군가 숲속에서 듣는 이 한 명도 없이 혼자 악기를 연주한다면 그것을 공연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학생들을 최대한 자극하기 위한 노골적 질문이었던 만큼 강의자가 겨냥한 논제가 예상대로 튀어나왔다. 공연의 성립 근거는 무엇인지, 그리고 공연에서 공동체라는 존재와 사람들의 상호작용은 얼마나 중요한지라는 문제였다.
순식간에 공연들이 사라지는 사태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생각하는 것이 급선무지만, 동시에 공연의 현장성과 그곳에서 사람들이 맺어왔던 관계가 어디까지 바뀔지를 떠올려본다. 예술의 향유방식은 삶의 양식에 발맞추어 변화한다. 사람들이 음악의 현장에 모이지 않고, 현장에서 느슨하게나마 형성되어왔던 ‘공동체’라는 환영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이제는 이런 의외의 미래마저 상상해볼 수 있게 되었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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