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100년 전 한국문학 ‘번역’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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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산책자]100년 전 한국문학 ‘번역’하기

초등학교 시절, 동화와 만화의 세계를 지나 소설의 세계로 진입할 때, 근대 한국문학 명단편들을 접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처음 읽는 소설들이 한국 작가들이 쓴 소설이기를 원하셨다. 번역된 소설보다 한국 소설을 권하신 이유는, 우리말을 배우는 과정에 있는 아이에게 한국 작가들이 고민해서 공들여 써내려간 단어와 문장들을 만나게 하고 싶으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우리말을 잘 익히고 나서, 번역 글을 만나면 훨씬 좋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 책들은 지금도 선명하게 내 기억에 남아있다. 흰색 양장으로 싸인 바랜 속지, 그리고 활자를 찍었을 때 눌린 자국 선명한 글자들.


김동인, 이효석, 이상 등의 단편소설에서 시작된 여정은 염상섭, 황순원을 거쳐 최인훈, 이청준으로 옮겨갔고, 요즘도 그때 읽은 책들이 내가 읽고 쓰는 바탕이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의 독서는 이런 경로를 밟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교과서를 들여다보면 오래된 작가들보다 동시대의 작가들이 훨씬 많고, 좋은 우리말을 익힐 수 있는 다른 방법들도 있을 것이라 꼭 문학사를 훑어 올라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젠 내가 읽던 한국의 명단편들은 100년이나 지난 소설들이 되었다. 이 작품들을 읽는 것은 훈고학적 취미가 아니라면 굳이 그럴 이유가 분명치 않은 일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그래도 작가의 탄생 200년, 사망 150년 등을 기리며 외국 작가들이 쓴 책이 여전히 많이 읽히는 것을 보면서 기껏해야 100년 남짓 된 우리 문학이 독자들의 관심 밖으로 점점 밀려나는 것은 속이 상했다. 그래서 ‘오리지널 사운드북(OSB)’이라는 레이블을 설립해서 첫번째 프로젝트로 100년 전의 우리나라 소설들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처음 시도하는 것은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이 100년 전, 우리 소설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이다. 일제 식민지, 한국전쟁, 군사독재와 민주항쟁 등 이 땅에 직접 살면서 건너온 100년이 아득하다. 그 세월을 지나면서 일어난 사회상과 언어 사용의 변화도 만만치 않을 터. 분단 70여년 동안, 남한과 북한 언어에 생긴 차이 때문에 <겨레말 큰사전>까지 만들어야 할 정도이니 100년 전 소설과 소통하기 위해서도 사전이 필요하고 그 사전에 기댄 ‘번역’본도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해조가 20세기 초에 쥘 베른의 소설들을 번역·번안했지만,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쥘 베른은 신소설풍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우리가 읽는 100년 전의 한국 작가들은 그 시대의 문체와 시대상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채로 현대의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내가 처음, 아버지의 서재에서 꺼내 읽은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는 세로쓰기로 인쇄된 양장본이었는데, 요즘은 그 번역을 아무도 읽지 않는다. 독자들은 새로운 장정에 담긴 새로운 번역을 즐기고 있다. 서구의 작가들이 쓴 작품들은 10년, 20년을 단위로 새로운 번역의 옷을 입고 독자들과 동시대를 호흡한다. 심지어 한 시기에 여러 번역이 나와서 서로 경쟁하기까지 하는데, 한국의 소설들만 그런 움직임에서 비켜 서 있었다. 세계문학전집만큼 예쁜 껍데기를 가진 한국문학전집도 시중에 많이 나와 있다. 하지만, 텍스트는 여전히 이 시대가 아니라 작품이 탄생한 시대를 호흡하고 있다.


100년 전의 한국문학을 지금의 한국문학으로 ‘번역’하는 것이 외국문학 번역보다 어렵다. 그 시기의 한국문학을 교과서 삼아 공부했던 오늘의 작가들이 글자 하나 고치는 것도 신중히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쓰임이 줄어든 말이지만 없어진 말은 아닌 경우, 외국문학 번역이라면 당연히 많이 쓰이는 말로 고치겠지만 한국문학의 경우는 맥락과 용법이 적절한지 고민을 휠씬 많이 할 수밖에 없다. 


작가의 유족과 후손들이 이 시대를 함께 살고 있기에 손을 대는 것이 더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낸 것은 현대의 입말에 맞춰 수정하지 않으면 듣기만이 아니라 읽기도 힘든 오디오북의 대본을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힘들게 ‘번역’했지만, 과감하게 ‘번역’하지 못한 탓에 노련한 배우들이 읽는 데 여전히 힘들어 하는 경우도 있다. 녹음과정에서 읽기에 미흡하다고 판단되어 다시 ‘번역’을 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어렵게 번역하고 녹음해서 새로이 작곡한 노래를 예술가들이 직접 연주해서 입히고 있다. 동시대의 작가가 ‘번역’하고 배우들이 읽은 소리를 예술가들의 연주 위에 얹어 세상에 내놓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주일우 이음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