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의사의 도움으로 강한 자외선을 쏘이고, 색소변화를 유도하는 약을 복용한다.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자 검은 피부로 변해버린 자신을 마주한다. 그렇게 존 하워드 그리핀은 소기의 목표를 달성한다. 백인의 삶을 거부한 그는 인종차별이 극심한 미국 남부지역으로 약 50일간의 여행을 떠난다. 때는 1959년이었다.
흑인의 외형으로 변한 그리핀은 과거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스스로 인권운동가라 여긴 백인남성은 피부색을 바꾸고 나서 불편한 현실과 마주친다. 백인이라는 특권을 누렸던 자가 겪어야 하는 한시적인 체험이었다. 길에서 백인여성과 눈이 마주쳤다가 듣는 폭언은 예사였다. 대놓고 흑인을 멸시하는 백인의 폭력적인 태도에서 그는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변장한 백인이 받아야 했던 차별과 폭력의 기록은 책 <블랙 라이크 미>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다. 출간과 동시에 본격적인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는 그리핀의 삶은 여전히 험난했다. 백인 우월주의자로부터 지속적인 살해위협에 시달려야 했으며, KKK단으로부터 집단구타를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흑인의 삶을 몸소 체험했던 그는 피부암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난다.
또 한 명의 인물을 소개한다. 레이철 돌레잘 역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다. 그리핀과는 다른 목적으로 백인인 자신을 흑인이라 칭했던 여성이다. 돌레잘은 흑인으로 행세한 이후부터 그리핀과는 전혀 다른 궤적의 삶을 일궈낸다. 미국을 대표하는 흑인인권단체인 ‘미국 흑인 지위향상 협회(NAACP)’의 지부장을 맡은 돌레잘은 백인을 비난하는 흑인 인권운동가로 활약한다.
대학강사와 경찰 옴부즈맨위원장으로 활동하던 돌레잘은 자신의 부모에 의해 정체가 탄로난다. 부모는 자신들이 돌레잘의 생물학적 친부모라는 증거로 돌레잘의 출생증명서와 함께 푸른 눈에 금발인 어린 시절 사진을 공개했고, 미국은 혼란에 휩싸인다. 언론이 주목한 이유는 바로 피부색의 아이러니였다. 백인의 피부색을 부러워하는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거스른 돌레잘의 변신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흑인의 인생이 오히려 득이 되는 집단에 편입되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에 성장환경이라는 변수가 추가되었다. 돌레잘이 다녔던 하워드대학은 대다수가 흑인이었기에 백인학생이 역차별을 받는 일이 흔했다. 게다가 백인부부인 자신의 부모가 흑인자녀를 입양하면서 백인의 정체성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돌레잘의 대학 전공은 아프리카 미술이었다. 흑인 어투를 사용하기 시작한 돌레잘은 공개적으로 백인집단을 비난하는 발언을 퍼붓는 검은 피부의 인권운동가로 행세한다.
여기 등장하는 두 인물은 인권운동가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학습차원에서 흑인행세를 했던 그리핀과 NBC 방송에서 자신을 흑인으로 생각한다고 인터뷰한 돌레잘은 인종결정권이라는 측면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이는 국적처럼 백인과 흑인이라는 피부결정권도 개인의 선택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숙제를 남긴 사건이다. 여기서 피부색이란 인간을 파괴하거나 과대평가하는 일종의 가면이다. 인디언과, 유대인과, 재일한국인에 대한 핍박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70년 넘게 이어져 온 이념갈등이 한창이다. 피부색도, 언어도, 유대인 여부도 문제가 되지 않는 땅에서 벌어지는 반목의 악순환이다. 누가 한국인을 색깔논쟁의 우물 속에 빠뜨렸는가. 누군가의 관계이자 기억이었던 이들이 광장으로 모여든다. 그들은 흑백갈등이라는 인종차별의 경험과 상처가 전무한 대한민국의 과거이자 현재다.
흑인으로 변장한 그리핀은 자신을 불쾌하게 여기는 백인을 향해 이렇게 묻는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기분 상하게 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피부색만으로 불쾌감을 유발케 했던 원인은 바로 차별의식이라는 부패한 관념이었다. 인간의 관념은 변하거나 농도를 달리한다. 단지 저마다의 바닥에 다른 색깔의 관념을 덧칠하고 있을 뿐이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취향의 발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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