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이 세상을 이끄는 주역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은 역설적으로 전쟁 때문이었다. 남성 대다수가 전장에 불려나가 죽음을 맞거나 큰 부상을 입었을 때, 남겨진 여성들이 세상을 움직였다. 남성이 부재한 세상에서 노약자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각자 자신만의 역할로 삶을 이어나갔다. 전쟁은 이처럼 여성의 가치를 새롭게 증명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여성 일자리와 여성인권에 대한 문제제기도 공식화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인 리자 먼디의 <코드걸스>에선 여성들의 세상 만들기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설명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에서 활약한 암호 해독자 2만명 중 1만1000명이 여성이었다. 그들은 당시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쓰레기통을 비우거나 연필을 깎는 등 사소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인식됐다. 그래서 더 안전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여성의 힘은 이처럼 세상의 무지와 몰이해를 넘어 그 기능의 안정성과 효율성을 보여주었다.
배우 정유미가 출연한 영화 '82년생 김지영'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할리우드 영화가 보여주는 남성의 역할이 사회적 권력을 강화시키는 기득권 리모델링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여성의 목소리를 지켜내기 위해 시작된 평가지수가 ‘벡델테스트(Bechdel test)’이다. 이 평가지수는 여성 관련 주제와 여성 배우 및 스태프, 남성과 관련된 내용이 아닌 대화 등을 통계수치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견제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할리우드 영화는 남성 중심의 관점에서 자본 만들기를 강화하며 평등한 성적 코드의 제시가 어려워 보였다.
반면 애니메이션은 이미 오래전부터 조용히 혁신을 시도해 왔다.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을 다른 영상 미디어가 힘들어할 때 애니메이션은 조용하지만 당당히 여성을 주인공으로 세웠다.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주체적 위상에 여성이 서 있다. 애니메이션 장르가 만들어낸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여성의 목소리로 세상을 바꾸는 시작을 만들었다. 1990년대부터 미야자키 하야오의 휴머니즘이 그랬고, 2010년 이후 갑자기 전략을 선회한 디즈니도 그렇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필모그래피는 여성으로 시작해서 여전히 여성으로 이어진다. 그의 출세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부터 <미래소년 코난>의 극장판으로 불리는 <천공의 성 라퓨타>, 지브리 스튜디오의 로고가 된 <이웃집 토토로>, 아름다운 유럽을 배경으로 하여 할리우드 연출로 완성한 <마녀배달부 키키>, 일본식 판타지의 전형을 글로벌화한 <원령공주>, 아카데미상 수상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인어공주를 재해석한 <벼랑 위의 포뇨> 등 숱하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세상을 내려다보며 그들의 순수함으로 다시 세상을 조율한다. 잔잔한 담론인데 결론에서 비수처럼 주제가 꽂히는 그의 연출은 여자 주인공들의 무표정에서 항상 시작한다.
곧 <겨울왕국 2>가 개봉한다. 딸과 함께 부모가 가장 많이 본 영화라는 해석부터 뮤지컬의 헤비유저인 여성들이 복수관람하면서 관람객 1000만명을 넘겼다는 후담까지, <겨울왕국>의 판타지는 여성의 세상바꿈을 현실로 보여준다. 남성 담론의 장르 영화를 선두에서 제시했던 디즈니도 픽사의 디즈니 입성과 함께 대전환을 시도했다. 긴 생머리를 싹뚝 잘라낸 <라푼젤>, 숲속을 달리며 화살로 세상을 쏘던 <메리다와 마법의 숲>, 모험과 도전의 <모아나>, <인사이드 아웃>의 ‘슬픔이’까지 픽사를 품은 디즈니는 혁신을 위해 남성 조역을 어떻게 위치시킬 건지 고민 중이다. 오랜만에 개봉한 <터미네이터>도 여성을 내세웠다. 미래에서 온 터미네이터는 여성을 공격한다. 여성이 주인공이며, 여성이 문제 해결의 출발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지 최근 개봉한 <82년생 김지영>의 페미니즘 논쟁을 보며 고민한다. 방향보다 방법에 대해, 대안보다 젠더의 본질부터 고민해야 함을 느낀다.
<한창완 세종대 융합예술대학원장>
'대중문화 생각꺼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책자]100년 전 한국문학 ‘번역’하기 (0) | 2019.12.02 |
---|---|
[이문재의 시의 마음]국립대 도서관에서 1박2일 (0) | 2019.11.11 |
[문화중독자의 야간비행]인종차별·색깔논쟁 ‘핍박과 반목’의 역사 (0) | 2019.11.01 |
[문화로 내일 만들기]소소한 이성의 직진 (0) | 2019.10.18 |
[기자칼럼]성평등과 인간성 (0) | 2019.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