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에 다녀왔다. 두 번째 방문이지만 처음처럼 새로웠다. 3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탓이다. 기억이 희미해지기도 했고 변화가 크기도 했다. 첫 방문 때는, 소련이 막 개방을 선언했지만 소련 연방 국가들이 독립하기 전이었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조지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몰도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이 독립하고 러시아는 옛 이름을 찾았다. 이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유럽공동체에 가입했고 조지아와 러시아는 전쟁까지 했다. 하지만 나머지는 독립국가연합이라는 느슨한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다. 소련이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있던 때와 지금 사이엔 수많은 사건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차이들이 놓여 있다.
첫 번째 방문했을 때는 갑자기 열린 세계에 대한 편견과 경계 때문에 여행하면서 차분히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연구재단의 전신인 학술진흥재단에서 조직한 그 방문의 목적 자체가 무너진 소련의 실상을 보고 사회주의의 허망함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허약해서 몰락한 사회주의권을 방문하는 것이었지만 경계도 심해서 정보기관의 요원들과 함께 여행을 했다. 내 마음의 벽도 높은데 감시까지 받는 처지라서 자유롭지 못했다. 인상적이지만 권위적인 건물의 외형과 보드카에 취해 다니던 낭인들의 모습만 머리에 담고 돌아왔다. 다시 모스크바를 방문하기까지 30년 동안 전해들은 이야기들도 나쁜 소식들이 많았다. 후진적인 정치 시스템과 몇몇 재벌들에 집중된 경제체제에 대한 이야기들이 으뜸이었다. 깡패, 심지어 경찰에게 돈을 뜯겼다든지 속임수에 돈을 잃었다는 개인적인 경험담도 여럿 전해들었다.
월드컵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모스크바는 깨끗했다. 그리스 친구는 대사관에서 불러준 택시만 탄다고 했는데, 스마트폰 앱으로 불러서 탄 택시에서 사기나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이 거대한 도시에서 중심과 변두리가 확연히 나뉘어 보이지 않았다. 서울, 런던 같은 큰 도시들은 모두 도심과 변두리의 분위기 차이가 확연한데 녹지와 큰 건물들이 비교적 균등하게 분배되어 있다. 이런 규모의 도시들 중에서 공원이 가장 많은 도시라고 들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문화적 저력과 시민들의 밝은 기운. 고전을 읽고 클래식 음악을 듣는 세대가 저물고 있다는 걱정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 세대가 버티고 있었다. 거리 축제에서, 마르크스 동상 앞에서 시작해서 도심 전체를 채운 춤과 퍼포먼스를 지치지 않고 보여주는 젊은이들의 웃음과 에너지에는 거짓이 없었다. 현지 대사관 관계자도 2~3년 전부터 모스크바 사람들의 표정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외교가에서도 모스크바에 발령이 나면 험한 곳에 가게 되었다고 주변에서 걱정을 하는데 정작 현지에 오면 애써 즐거운 표정을 감춘다고 한다.
수교 30년이 되는 2020년에 서울국제도서전의 주빈국으로 러시아가 오고, 모스크바국제도서전의 주빈국으로 한국이 가기로 합의했다. 러시아는 인구가 1억4000만명이다. 독립국가연합과 아직도 제법 강한 유대를 가지고 있는 동구권, 그리고 종교적으로 정교회, 역사적으로 동로마 제국 등과의 관계 때문에 문화적으로 깊은 유대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까지 합하면 서유럽 전체와 맞먹는 규모의 인구가 있다. 최근의 동구권 관광 러시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와 문화의 전통이 깊고 풍부하다. 정작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러시아의 작가들이래야 러시아혁명 이전의 푸시킨,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기껏 끌고와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정도에서 머물러 있다. 출판시장의 상황이나 규모, 현황에 대한 정보도 일천하다.
우리나라 출판산업에서 수출은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시장의 가능성을 엿보고 있는 중이다. 서유럽이나 미국은 그들의 견고한 출판산업의 장벽이 높고, 중국은 시장이 크지만 국가의 통제가 강해서 사업이 쉽지 않다. 동남아 시장의 가능성을 넘보고 있지만, 아직 그들의 문화적 성숙을 조금은 기다려야 하는 상황. 남미 시장도 규모로 보면 가능성이 있지만 복잡한 정치 상황과 경제적 난맥상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다. 여기에, 새롭게 탐색해야 할 러시아와 그 주변의 시장이 있다. 2020년, 러시아와 도서전 주빈국을 교환하는 것은 이 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본격적으로 문화적인 교류를 시작하기 위한 선발대를 주고받는 셈이다. 물론, 모스크바에 대한 새로운 인상이 그전의 편견 때문에 반사적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편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숫자로만 봐서도 러시아와 출판과 문화 교류를 서두를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주일우 | 이음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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