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체제에 대한 거부감, 편견으로 이어지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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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체제에 대한 거부감, 편견으로 이어지지 않길"

출처 : 노컷뉴스 (http://www.nocutnews.co.kr/)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00~20:00)              ■ 방송일 : 2011년 2월 16일 (수) 오후 7시 30분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양영희 감독

평양-오사카 이산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굿바이 평양'

▶정관용> 시사자키 3부 시작합니다. 오늘 3부 아주 특별한 손님을 모셨는데요, 일본에서 오신 분입니다. 영화감독이시고요, 평양과 일본에 가족들이 흩어져 살고 있는 이산가족입니다.

평양에 있는 가족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서 영화를 만들고 계신 양영희 감독. 2005년에 <디어 평양>이라는 영화를 만들어서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베를린 국제영화제 폭스바겐 상을 받아서 국제적인 주목을 받으셨지요. 이번에 <굿바이 평양>이라는 신작을 들고 오셨어요. 광고 듣고 양영희 감독 함께 만납니다.

▶정관용> 평양에 살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서 영화를 만들어오신 분, 이번에 <굿바이 평양>이란 신작을 들고 오신 양영희 감독, 어서 오십시오.

▷양영희> 안녕하세요?

▶정관용> 영화배우를 하셔야 하는데 왜 감독을 하세요? 워낙 미모시라 제가.

▷양영희> 아니에요. 옛날에 조금 극단활동은 했는데요, 무대에도 서 보니까 영화배우? 배우로서의 재능은 진짜 없는 것을 깨닫고 좌절했어요.

▶정관용> 제가 아까 소개했습니다만, 2005년도에 내신 <디어 평양>도 그렇고 이번에 내신 <굿바이 평양>도 그렇고 다 다큐멘터리 영화지요?

▷양영희> 예.

▶정관용> 보통 영화감독 모시면 영화 이야기로 바로 들어가는데, 다큐멘터리 영화이기도 하고 또 양영희 감독의 실제 가족사를 다룬 영화이기 때문에 그래서 먼저 양영희 감독 얘기부터 하겠습니다. 재일동포 2세시지요?

▷양영희> 그렇습니다.

▶정관용> 일본에서 태어나셨고? 부모님 고향은?

▷양영희> 제주도. 아버님은 제주도에서 태어나시고 15살 때 일본으로 건너오셨어요. 어머님 가족도 다 제주도 출신이세요.

▶정관용> 제주도 출신 분들? 부모님이 일본에 오신 건 언제였지요?

▷양영희> 아버지가 열다섯 살 때, 그러니까 1942년. 실은 어머님은 일본에서 태어나시고. 그런데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다 제주도 분이시고. 일본에서 만나셨어요, 두 분이.

▶정관용> 해방되기 직전에 일본에 가셨군요. 다시 돌아오실 수도 있었는데, 해방되고도 일본에서 계속 계셨네요?

▷양영희> 네, 여러 가지 사정. 또 뭐 우리 부모님이 4.3 사건하고도 관계가 있으신지, 그래서 남한 출신이지만 자신의 조국으로 이북을 선택 하시고 그 후에는 북한, 말하자면 김일성의 체제를 지지하고 조총련 활동가로 쭉 살아오셨어요.

▶정관용> 4.3사건이군요. 제주도 출신인데 왜 그럴까 했더니 바로 그런 게 있었군요.

▷양영희> 아주 많은 친척, 친구, 많은 분들이 희생되신 것 같아요.

▶정관용> 그래서 부모님이 두 분 다 맹렬 조총련계 활동가로 살아오셨다고 보도가 되어 있더라고요?

▷양영희> 네, 아주 맹렬하게. (웃음)

▶정관용> 두 분 다 작고하셨나요, 살아계시나요?

▷양영희> 아버지께서 재작년에 돌아가시고 어머님은 오사카에 계십니다.

▶정관용> 어머님은 지금도?

▷양영희> 사실 뭐 아들 셋이 다 평양에 있고 손자들도 많고. 또 어머님 동생들도 남한에서 일본에 왔다가, 그때 일본에서 하도 차별도 심하고 가난하고, 또 남한에서 재일교포에 대해서 완전히 무시, 그런 상태였고. 그때 이북에서 사실 안목이 있어서 그랬었지만, 김일성이 좀 교포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주는 것 같은 연설도 많이 했고 그래서 어머님의 형제도 이북에 가셨어요. 그래서 어머님은 아들, 손자, 형제들까지 가족이 다 이북에 계시니까 아무래도 그 가족을 위해서도 모순도 좀 많이 느끼시면서도 그래도 지금도 일단은 조총련 지지하시는 편에서 사시는데 제가 안 그렇게 사는 것도 이해를 많이 하세요.

▶정관용> 양영희 감독은 안 그렇게 사신다?

▷양영희> 저는 그런 가정에서 자랐고 조선학교에서 줄곧 대학까지 갔으니까 정치적인 교육도 받았지만 아무래도 일본에서 나서 자라면서 일본 문화 속에서 자랐고, 또 선택이 있는 사회에서 사니까. 또 미국에서도 생활을 해보고 그런 과정에서 저는 아무래도 북한이 이해가 안 된다, 또 남한에도 가보고 싶다는 그런 말을 하면서 아버지하고 잘 다퉜어요.

▶정관용> 그랬겠네요. 잠깐만요, 오빠 세 분이 전부 북한에 있다? 언제 가신 거지요?

▷양영희> 우리 오빠들은 70년대 초에 갔는데 실은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들이 일본에서 북한으로 갔다고 하면 지금 들으면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정관용> 그 당시에는 북송선이 굉장히 많이 있었지요?

▷양영희> 그렇지요, 1959년에 시작을 했는데 60년대에 아주 많이 갔어요. 60년대에 재일교포들이 9만 명 이상. 그 중에서 95% 이상은 고향이 남한이에요. 남한에서 온 사람들, 그 자녀들, 아이들이 당시에는 장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해서 이북에 갔는데 간 후에 실정을 알아도 이제는 못 돌아오니까.

▶정관용> 북한에서 안 보내주지요?

▷양영희> 예, 거기에서 못 나오니까.

▶정관용> 잠깐만요, 70년대 초에 오빠 셋이 한꺼번에 갔어요?

▷양영희> 처음에 둘째 오빠, 막내 오빠가 갔어요. 그런데.

▶정관용> 몇 살 때 간 겁니까?

▷양영희> 열네 살, 열여섯 살.

▶정관용> 그렇게 어린 나이에도 갔군요?

▷양영희> 예. 그때열 여덟 살이었던 큰오빠는, 장남은 일본에 남을 줄 알았는데 그때 조선학교에서 지명 받고. 너는 가라, 그렇게 지명 받고 가셨어요.

▶정관용> 부모님은 가실 생각을 안 하셨나요?

▷양영희> 당시는 3년, 5년, 길어도 10년 쯤 고생을 하면 통일이 될 거다, 또 이북하고 일본이 국교도 정상화될 거다, 라고 아주 낙관적으로. 지금 생각하면 너무너무 낙관적으로 생각을 하셔서 통일이 되면 아이들은 북한이나 일본에서 교육을 받아도 많이 차별이 없을 거라고 아버님은 생각을 하시고. 자기는 고향인 제주도에 돌아가고 싶다고 계속 말씀을 하셨어요.

그런데 오빠들이 간 후에 계속 실정은 어려워지고 당시 인상이 좀 안 좋았고 정치적으로도 복잡했던 남한이 계속 민주화가 되고, 더 좋아지고 아주 아이러니하게 됐지요.

▶정관용> 오빠들이 갈 때 양영희 감독은 나이로 봐서는 어린 나이였겠네요?

▷양영희> 여섯 살이었어요.

▶정관용> 기억이 좀 가물가물하시겠네요. 그런데 오빠들이 가서 셋 다 평양에 살아요?

▷양영희> 예.

▶정관용> 조카들도 평양에 살고?

▷양영희> 예.

▶정관용> 그런데 오빠들을 만나러 평양에 처음 간 게 언제입니까?

▷양영희> 17살 때. 그러니까 11년 만에 만났어요.

▶정관용> 11년? 그 사이에는 왜 못 가셨어요?

▷양영희> 그때는 왕래길이 아직 없어서.

▶정관용> 한번 가면 못 오는군요?

▷양영희> 그 후에 첫 시기 왕래 시작한 것은 조총련의 간부들만. 무슨 특별한 대표단이나 그렇게 해서 가기 시작하면서, 점점 학생들도 조국 방문을 시킨다, 하는 식으로 조금씩 가기 시작해서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정관용> 그러니까 80년대 초반 되었을 것 같고. 가서 11년 만에 처음 본 거네요? 갔더니 조카들이 있었지요?

▷양영희> 그때는 오빠들이 아직 아이가 없어서. 처음 만난 것은 75년이었는데, 그냥 만났지만 학생 대표단으로 가서 만났지만 아주 면회 시간이 제한되어서.

▶정관용> 85년 아닌가요? 75년이 아니라.

▷양영희> 제가 64년생이고, 아, 계산을 잘 해야지. 아, 81년, 죄송합니다.

▶정관용> 81년, 그때 17살에 처음 가서? 그 다음에는 얼마나 자주 왕래를 할 수 있었던 거예요?

▷양영희> 2, 3년에 한 번 쯤 갔습니다. 아무래도 오빠들이 사는 곳을, 학교에서 배우는 정보나 조총련에서 저에게 배워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 오빠들이 어떤 데에서 살고 뭘 생각하고 뭘 먹고 어떻게 지내는지 제가 피부로 느끼고 싶어서 의식적으로 자주 갔습니다.

▶정관용> 가 봤더니 잘 살던가요?

▷양영희> 일단 우리 오빠들은 일본에서 부모들이 일본 돈, 엔도 보내고 또 물자를 많이 보냈으니까 일단은 평양 사람치고는 나은 축이라고 할까요? 그래도.

▶정관용> 부모님이 꾸준히 보냈어요, 돈을?

▷양영희> 꾸준히 30년 이상 소포를 보내고, 돈을 보내고, 약을 보내고, 옷을 보내고, 연필, 지우개, 손자들의 옷, 다 보내셨어요. 우리 어머님의 인생은 진짜 소포 보내는 인생이고. 아버님은 그 실정 아시면서 계속 만세를 부르시고.(웃음) 그에 대해서 하나 남았던 여동생은 이제 이해가 안 간다, 모순이다 하면서 집을 나가고 아빠하고 다투고 뭐.

▶정관용> 그 하나 남은 여동생이 양 감독이에요?

▷양영희> 네, 저예요. 계속 문제생으로. 하도 오빠 만나러 갈 때마다 오빠들이 살아왔던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특히 큰 오빠가 조울증을 많이 앓았어요. 정신적으로 많이 앓고, 안 좋은 오빠를 보면서 평양에 있는 동안 많이 울었어요.

▶정관용>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야겠다, 그리고 이걸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언제 하신 거예요?

▷양영희> 서른 살 때. 95년. 95년에 처음으로 카메라를 들고 평양으로 갔습니다. 처음에는 가족의 기록을 남기자는 것이었는데.

▶정관용> 카메라 들고 가는 것은 제재 안 하지요?

▷양영희> 그때는 완전히 홈비디오 형식의 그런 카메라고, 가족의 기록이다. 세관이나 감시하는 사람들이 좀 테이프가 많다, 또는 왜 그렇게 많이 찍냐고 물어봤지만 일단 저는 이건 나의 일기장이다, 비디오 일기장이다 하면서 많이 찍고. 그런데 점점 더 내 마음 속에서 작품으로 내놓고 싶다, 라는 마음이 더 강해져서 아주 위험하지만.

▶정관용> 갈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가셨고. 2, 3년 만에 한 번씩 갈 때마다. 그리고 가서 가족들의 모습을 다 찍고. 평양 거리의 모습, 다른 시민의 모습 이런 것도 찍었나요?

▷양영희> 거리는 좀 찍지만 다른 시민의 모습은 많이는 못 찍고. 찍으면 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니까. 거리나 조금 뒷골목. 우리 오빠들이 사는 아파트 주변하고 아파트 안에서 많이 찍었어요.

▶정관용> 극히 제한된 범위겠군요? 평양 전체를 다니면서 막 찍고 그럴 수는 없는 거지요?

▷양영희> 그래도 많이 가니까 많이는 찍었지만 제가 보이고 싶은 것도, 평양에 대한, 북한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가족에 대한 아주 프라이빗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그러니까 너무 욕심을 내지는 않고 찍었어요.

▶정관용> 그렇게 해서 95년부터 촬영을 쭉 시작하셔서 계속 모은 테이프들을 편집하고 하나의 스토리로 만들어서 2005년에 <디어 평양>이라는 것을 내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제가 아까 소개한 것처럼 유수한 국제 영화제에서 상도 타고.

▷양영희> 네.

▶정관용> 그런데 <디어 평양>, 이름은 <디어 평양>인데, 이걸 내시고 나서 북한 쪽에서 입국 금지조치를 당하지 않으셨어요?

▷양영희> 당해서 지금 가족 못 만나게 됐어요.

▶정관용> 2005년, 이 영화 내신 후에는 못 가신 거지요?

▷양영희> 2005년에 갔는데 그 후에 못 가고 있어요.

▶정관용> 이 영화의 내용이 북한에서 보기에는 싫은 내용이군요?

▷양영희> 물론 찬양은 안 하고 그 나라에 다니면서 제가 느꼈던 내레이션으로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리고 또 우리 아버님께서 제가 아주 직설적으로 ‘아빠, 오빠들 셋 다 보낸 거 후회 안 하세요?’, 이렇게 물어보니까 설마 아버님께서 그런 말씀을 카메라 앞에서 할 줄 생각도 안 했는데, ‘당시는 너무 젊었다. 당시는 판단이 너무너무 낙관적으로. 또 남한하고 관계도 나빴고.’ 좀 솔직하게 말씀하신 것을 그냥 냈어요. 그 부분이 좀 문제가 된 것 같아서.

▶정관용> 그러면 이번에 <굿바이 평양>은 과거에 10년 동안 찍으셨던 것을 또 다른 스토리로 다시 편집하신 그런 거라고 봐야겠네요?

▷양영희> <디어 평양>은 테이프는 2001년까지의 북한에서 찍은 것을 썼는데, 2005년에 찍은 것도 좀 넣고. 그 후에 선화가 성장한.

▶정관용> 선화가 누구예요?

▷양영희> 둘째 오빠 딸이에요. 조카. 지금 선화가 대학생이 됐는데, 선화가 3살 때부터 대학생이 될 때까지 성장과정을 찍은 것이에요.

▶정관용> 그래서 보니까 원래 영화의 원제가 <선화, 또 하나의 나>였다고 하던데 근데 왜 <굿바이 평양>으로 붙였어요?

▷양영희> 너무 제목이 평범하다는 얘기도 많았고. 그리고 또 <디어 평양>의 제2부작이라고 할까요, 에피소드 2로서. <디어 평양>의 평양과 <굿바이 평양>의 평양은, 저로서는 완전히 정반대의 평양이에요.

▶정관용> 어떻게 달라요?

▷양영희> <디어 평양>의 평양은, 디어,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평양은 북한의 수도나 혁명의 수도가 아니라 단순하게 제가 제일 그리워하는 가족이 사는 장소, 그 이름. <굿바이 평양>은 정치적인 평양에 대한 안녕이고, 또 우리 가족에 대해서는, 지금은 못 만나지만 다시 만나자라고 하는 그런 좀 복잡한 심정으로 제목을 달았어요.

▶정관용> 그러면 이번 <굿바이 평양>에는 조금 더 정치적, 사회적 발언이나 그런 내용들이 더 많이 들어있습니까?

▷양영희> 아니에요, 거꾸로 <디어 평양>에 조금 더 많습니다.

▶정관용> 방금 설명하신 거를 제가 거꾸로 들었나요? <디어 평양>은 내가 보고 싶은 가족이 사는 평양이다, <굿바이 평양>은, 아, 정치, 이런 것을 떠나서 가족들만 보고 싶다, 그런 의미군요? 그런 의미에서 평양이라는 단어를 썼다?

▷양영희> 예.

▶정관용> 정말 하시고 싶은 얘기가 뭐예요? 이 영화를 통해서?

▷양영희> (웃음) 그냥 제가 출연은 안 하는데, 실은 그래도 포스터 같은 데 사실은 제가 아주 적게 나오지만, 그 한 장면이 포스터가 됐지만, 내레이션으로 출연하는, 정말 저의 내레이션이 원래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이고요,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영상을 덧붙인 것 같은데, 가족이 있으니까 간다. 또 평양이란 나에게 있어서 무엇인가.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는 모르겠지만, 나, 양영희라는, 이런 가족 환경에서 자란 나에게 있어서 평양은 무엇일까.

▶정관용> 평양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하면?

▷양영희> 그립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고. 결코 혁명의 수도에 가고 싶어서 제가 몇 번이나 간 것도 아니고. 영광스러운 조국에 간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런 정치적인 말을 하도 많이 듣고 자라니까 좀.

▶정관용>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 거기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그냥 그런 얘기로?

▷양영희> 예.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있다, 그런 것을 좀 느껴줬으면 해서 만들었습니다.

▶정관용> 그나저나 그런 가정에서 자란 양 감독님이 한국에 오는 데는 아무 제약이 없나요?▷양영희> 지금은 없어요.

▶정관용> 언제까지 제약이 있었어요?

▷양영희> 제약보다 국적이 소위 말하는 조선 국적이었어요. 그래서 2001년인가, 2002년인가 한국 국적을 취득해서 2003년에 처음 한국에 왔습니다.

▶정관용> 그때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데는 별로 문제가 없었고요?

▷양영희> 예. 그 전까지는 아버님이 절대 용서 안 한다고 하셨으니까. 북쪽에만 많이 가서 남한에 못 가서 아주 안타까웠는데.

▶정관용> 지금은 한국 국적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양영희> 예.

▶정관용> 아마 90년대 후반, 김대중 정부 들어서기 전까지는 조총련계 활동을 하신 분들은 설사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입국이 힘들었을 거예요. 97년 이후에 상당히 변화가 생겼고 아마 그 와중에서 국적 취득이 이루어진 것 같고. 이제 한국에도 오시고 싶으면 아무 때나 오실 수 있는 그런 거네요?

▷양영희> 예, 아주 자유롭게.

▶정관용> 북한은 가고 싶지만 못 가는, 그런 상태가 되어버렸네요.

▷양영희> 예, 그렇지요.

▶정관용> 요즘 남북관계가 아주 안 좋아요. 특히 작년에 아주 아픈 일도 많았었고, 이런 상황들 닥치면 아무래도 다른 분들보다도 특히 양 감독님 마음속에서는 이런 저런 생각들이 날 것 같은데요.

▷양영희> 일본에 있으면, 아, 그런 짓을 하는 나라는 그냥 공격해버리라, 하는 그런 우경적인 의견을 말하는 평론가들도 있고요 그런 의견을 들으면 마음도 아프고 머리도 아픈데. 아무튼 제가 항상 명심하자고 하는 것은 사회 체제나 권력자에 대한 혐오감이나 거부감이 있어도 그것이 거기 사는 일반 사람에 대한 편견이나 혐오감으로 되면 절대 안 된다, 그런 것은 따로 봐야겠다.

▶정관용>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서 한국이 공격당하고 이런 걸 보면 마음이 아프실 거고, 또 그것 때문에 북한 저기에다 공격해버리자 하면 거기 사는 오빠들 때문에 또 마음이 아프실 거고.

▷양영희> 예.

▶정관용> 이러나저러나 빨리 통일이 되어야 양 감독님의 마음 아픔은 사라지겠네요.

▷양영희> 예. 그런데 통일이 하도 어렵다면, 통일이 안 되어도 좀 사람이 오고가고, 편지도 오고가고, 이메일 주고받고 그렇게 빨리 해야겠는데, 그렇게 안 되겠지요, 아직?

▶정관용> 뭐 되겠지요. 언제 개봉합니까?

▷양영희> 3월 3일.

▶정관용> 무슨 말을 하셨는지 한번 들어봐야겠습니다. 이 영화에 흐르는 어머니의 노래라고 하는 곡이 있는데 제가 기사를 보니까 가사가 아주 좋다고 해요. 그래서 조금 빨리 끝내고 가사를 많이 들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