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기억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다. 비슷한 기억을 공유해도 제각각의 해석과 이유를 내재하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고래사냥’이라는 고유명사 역시 마찬가지다. 창시자는 작가 최인호였다. 대학시절 노래, 영화, 소설의 순서대로 접했던 <고래사냥>은 봉인된 시간을 열어주는 열쇠 같은 존재였다.
송창식이 부른 ‘고래사냥’은 영화 <바보들의 행진>의 주제가로 등장한다. 일간스포츠에 연재한 최인호의 소설을 영화화한 <바보들의 행진>은 1975년 국도극장에서 개봉한다. 이후 노래 ‘고래사냥’은 금지곡이라는 작은 훈장을 받는다. 고래사냥의 유효기한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1983년 최인호의 장편소설로 모습을 선보인다. 작가는 영웅서사를 제거한 병태라는 인물을 내세워 대한민국 청년문화를 그려낸다.
소설은 방황을 거듭하다 일상으로 회귀하는 주인공을 묘사하는 소심한 결론으로 막을 내린다. 주인공 병태는 마지막까지 겁쟁이며, 유약하고, 눈물이 많은 비겁한 젊은이로 그려진다. 작가는 날이 밝으면 사람들은 자연히 잠에서 깨고 눈을 뜬다는 문장으로 변화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순환하는 역사 앞에서 인간의 개혁의지는 의미가 없다는 저자의 논리는 깊은 의문부호를 남긴다.
스스로를 우월감에 불타는 거짓 휴머니스트라고 자인한 병태는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부활한다. 이번엔 배창호가 감독으로 나선다. 김수철, 안성기, 이미숙이 참여하는 영화 <고래사냥>에서는 송창식의 노래가 등장하지 못한다. 1987년까지 금지곡이라는 형틀 속에 갇혀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작은 거인 김수철의 ‘나도야 간다’가 자리를 대신한다.
영화에서 민우(안성기역)는 변화를, 병태(김수철역)는 고립을 상징하는 인물로 나온다. 언로가 막힌 사회현실 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는 두 인물의 종착역은 달랐다. 민우는 변화를 모색하는 회색인의 삶을 유지한다. 병태는 고립에서 현실복귀라는 수순을 택한다. 그들은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한 상태로 격랑의 1980년대를 살아간다. 작가는 병태의 입을 빌려 고래는 개인의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에둘러 정리한다.
영화 <고래사냥>은 1985년에 속편을 선보인다. 당시 청춘스타였던 손창민과 강수연이 <고래사냥2>의 주연배우로 낙점을 받는다. 배경음악은 당시 국악에 심취했던 김수철이 맡는다. 이것으로 고래사냥의 신화는 휴지기에 들어간다. 시간이 흘러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염원하는 1987년 6월항쟁이 터진다. 광장에서 목놓아 노래 ‘고래사냥’을 외치던 이들은 병태처럼 일상으로 돌아간다.
2018년 가을에 반가운 소식을 접한다. 소설 <고래사냥>을 재출간한 것이다. 그러나 느낌은 예전 같지 않았다. 착착 달라붙던 인물 간의 대사는 어색했고, 방황의 이유 또한 모호해 보였다. 그렇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저자와 병태가 오매불망 움켜쥐려는 고래는 매력적인 숙제였다.
2020년하고도 1월이다. 1월이 주는 의미는 사뭇 비장하다. 크건 작건 간에 목표를 세우기 적당한 시기며, 털어버리고 싶은 습관과 이별하기 괜찮은 때다. 실천에 대한 부담을 핑계로 대충 살기에 만만치 않은 달이다. 생각과 실천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시간이 던져주는 숙제를 실천이라는 행위로 재단장할 기회다. 시간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그렇기에 아끼고 챙겨야 할 가치재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자신의 어딘가에 감춰놓은 고래와 만나보면 어떨까. 노래가사처럼 동해바다까지는 아니더라도 외딴 골목을 찾아 거닐어보자. 그곳에서 고래와 잊혀진 대화를 나눠보자. 잊고 지낸 자아와 재회하는 순간이 엄습할 것이다. 혹시 아는가. 민우가 상상하던 올곧은 고래가 마음 한 곳에 자리 잡을지.
3년이라는 시간이 화살처럼 흘렀습니다. 2016년 12월, 설레는 마음으로 첫 칼럼을 준비할 때가 떠오르네요. 보람도, 고민도, 책임감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번 칼럼을 끝으로 야간비행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독서인간의 서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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