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던 날, 나는 아이의 첫 재롱잔치를 보기 위해 유치원에 있었다. 아이도 나도 적당한 설렘과 긴장이 일던 그때 S출판사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그 내용을 읽고 통장을 확인하곤 옆의 아내에게 “오늘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말했다. 이유를 묻는 아내에게 “돈이 갑자기 많이 들어와서…”라고 답했다.
이 출판사와의 계약조건은 아마도 인세 후지급이었을 것이다. 2쇄가 모두 판매되고 3쇄를 찍으면 그때 2쇄에 대한 인세를 지급하는 방식이거나, 아니면 1년에 두어 번 책이 팔린 만큼 인세를 지급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런 걸 세세하게 살피고 계약하는 건 아니어서 인세가 들어오면 오나 보다, 안 들어오면 책이 안 팔리나 보다, 하고 짐작하는 것이 전부이기는 하다. 그런데 갑자기 ‘많이’라고 할 만한 돈이 입금된 것은 새롭게 찍을 N쇄에 대한 인세까지 함께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업계의 표준계약이라고 하면 대개는 후지급 방식이다. 출판사로서는 팔리지 않는 책의 인세비용까지 먼저 지급하는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내가 만든 1인출판사도 그 방식을 택하고 있다. 대신 그만큼의 인세는 작가에 대한 미안함과 마음의 빚으로 남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선지급 방식으로 미리 인세를 받으면 작가가 무조건 행복해지느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책이 잘 팔리지 않는 현실을 뻔히 알기 때문에 출판사에 미안해지는 것이다. 나에게 “당신의 출판사에서 책을 내고 싶습니다. 1쇄의 인세는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 작가도 있었다. 그는 내가 아는 가장 훌륭한 작가 중 한 명이었고 적당한 시간을 두고 충분히 1쇄를 소진시킬 만한 작가였음에도 그렇게 말했다. 업계의 사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인세라는 것은 먼저 받기에도, 주기에도 민망한 그런 것이 되고 만다.
S출판사 대표는 “고생해 책을 써도 잘 팔리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의 이런 선택이 작게나마 작가님들께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도 나도 서로 쉽게 행복해지기 어려운 업계의 구조적 문제 안에서, 이러한 개인의 마음은 있는 그대로를 넘어 받는 사람의 처지와 더불어 확장된다. 사실 책 1000~2000권의 인세가 많아 봐야 얼마나 많겠냐마는 받는 마음은 책의 무게보다도 더 채워지는 것이다.
<머니볼>이라는 영화의 어느 장면이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다. 팀을 리빌딩하려는 야구팀 단장이 다른 팀에서 방출당한 야구선수의 집을 찾아간다. 그 자리에서 몇십만달러의 계약서를 쓰고 빠르게 나오는데, 그 직후 선수와 선수의 아내가 “이거 봐, 말도 안돼…” 하고 서로 껴안는 데서 나는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이 부분을 몇 번이나 돌려보았다. 나는 그때 대학원생이었다. 나에게도 그런 크리스마스가 찾아오면 좋겠다고, 그때 소중한 사람들이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바랐던 것이다.
공연이 끝난 아이와 함께 유치원에서 나왔다. 아이가 가판에 놓인 브롤스타즈 인형꽃다발을 사고 싶다고 해서 가격을 물어 보니 3만5000원이라고 했다. 아니 이 조악한 것이 그 가격이라니, 그래도 오늘의 나는 이걸 사도 괜찮아, 하고 결제를 하려는데 이미 아내가 “뭐라는 거야 다른 거 사줄게” 하고 아이를 끌고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어떤 비싼 음식이든 먹으러 갈 준비가 되어 있던 나는 아이의 의견에 따라 동네 돈가스집에 갔다. 이전보다 몸집이 자란 아이들에게 돈가스를 하나씩 시켜주었다. 아마 <머니볼>의 야구선수도 그 크리스마스 밤에 가족과 함께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갔을지 모르겠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내가 만든 출판사에서 책을 낸 두 작가님께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까지 찍은 책의 인세를 오늘 모두 지급하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덕분에 출판사의 통장은 정말로 비어버렸지만 두 작가님의 크리스마스는 그 금액보다 조금 더 많이 채워졌을 것이다. 다음 쇄의 지급도 형편이 된다면 선지급 방식으로 계속해 드리고 싶다.
우리 모두 저마다의 구조적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 안에서 어떻게 타인과 함께 잘 살아갈 것이냐 하는 문제는 결국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받은 마음을 다시 타인에게 돌려주는 일은 중요하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은 그러한 마음을 전하기 조금 더 좋은 시기일 것이다. 모두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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