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밤 서울 잠실 주경기장. 1990년대의 시네필들이 매일 밤 기다렸을 음악, <트루 로맨스>의 ‘You are so cool’을 두 명의 비브라폰 주자가 연주하기 시작했다. 전설적 라디오 프로그램 <정은임의 영화음악>의 시그널 뮤직이었던 이 노래를 실제로 듣다니, 라디오를 사랑하던 때의 옛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회상에 빠져 있을 무렵 한스 짐머가 무대로 올라왔다. 자신의 오랜 팬이라는 멕시코 청년과 그의 여자 친구를 데리고. 청년은 무릎을 꿇고 청혼했다. 그 어떤 영화보다 감동적인 드라마가 영화음악 공연에서 일어났다.
<다크 나이트> 3부작을 비롯, <인셉션> <인터스텔라> <덩케르트>까지 크리스토퍼 놀런과의 작업으로 국내에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한스 짐머는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멈추지 않는 창의력과 실험성으로 자신을 진보시키는 영화음악가다. 존 윌리엄스, 엔니오 모리코네 등 지난 세기를 대표하는 이들이 클래식적 작법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었다면, 한스 짐머는 록과 일렉트로닉, 그리고 익스페리멘털의 방법론을 흡수하면서 디지털 시대에도 잘 들어맞는 음악을 만들어낸다. 자신의 스타일을 영화에 맞추는 것뿐 아니라 영화를 위해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크 나이트> 조커의 테마인 ‘Why So Serious’에서 바이올린 줄을 톱으로 긁어 캐릭터의 기괴함을 표현한다든가, <맨 오브 스틸>의 전투 신에서 드럼 사운드를 쌓아나가며 슈퍼맨과 조드 장군의 박력을 극대화했던 일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덩케르크>에 한스 짐머의 음악이 없었다면 영화의 매력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을 거라는 반응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그러니까 엔니오 모리코네나 히사이시 조의 내한 공연은 그 아름다운 선율을 듣기 위해 갔다면, 한스 짐머 공연은 그가 만들어내는 스펙터클을 눈앞에서 느끼기 위해 갔던 것이다.
한국 현지에서 고용한 오케스트라·합창단 세션을 제외하더라도 그가 데려온 연주자만 19명. 도합 50명 가까운 인원이 펼치는 공연이었음에도 사운드는 놀라웠다. 마치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벌어지는 리허설을 보는 듯 정교하면서도 생생했다. 연주자들의 퍼포먼스도 대단했다. 특히 무대 정중앙에서 리듬을 이끈 인도 출신 드러머 샤트남 싱 람고트라, 중국 출신 일렉트릭 첼리스트 티나 궈가 그랬다. 올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코첼라 페스티벌 공연에서 다른 쟁쟁한 뮤지션들을 제치고 한스 짐머가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데에는 이런 요소도 한몫했을 것이다. 한스 짐머 또한 피아노와 신시사이저, 기타와 만돌린을 오가며 지휘자의 역할 이상을 수행했다. 시각적, 청각적으로 최고 레벨의 무대에서 연주되는 곡들은 여느 공연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스 짐머의 모든 디스코그래피를 알지는 못했다. 영화광도 아닌 데다가, 음악 글을 쓸 때도 영화음악은 잘 다루지 않는다. 크리스토퍼 놀런과의 작업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이 공연에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놀랐다. “이 곡도 한스 짐머였단 말이야?”라는 감탄이 떠나지 않았다. <레인맨> <델마와 루이스> <라이온 킹> <트루 로맨스> <씬 레드 라인> <크림슨 타이드> <캐리비언의 해적> 그리고 <다크 나이트>와 <인터스텔라>까지 이날 연주된 노래들은 살면서 극장을 들락거린 경험이 있다면 반드시 들을 수밖에 없던 곡들이었다. 굳이 이 노래가 어디에 삽입된 곡이었는지를 알리기 위해, 무대 뒤에 해당 영화를 틀지 않아도 대번에 알아차리곤 했다.
후반으로 가며 고조되는 스펙터클에 비례하여 애잔한 회상도 쌓여갔던 건 그 때문이다. 멀티 플렉스 시대가 열리기 전, 극장에 간다는 행위가 하나의 이벤트였던 시절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저 영화는 어디서 누구랑 봤는데, 하는 묻혀 있던 기억들이 떠오르곤 했다. 그것은 한 아티스트의 공연을 넘어 무대 앞에 있던 이들 각자의 인생이 전시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앙코르인 <인셉션>의 테마가 끝나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면서 생각했다. 우리는 한스 짐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삶을 살아왔다고. 그의 팬이 아닐지라도 피해갈 수 없던 음악들이, 은막 위에 흐르며 우리 인생의 OST가 되었다고. ‘You are so cool’의 라이브 무대에서 청혼한 멕시코 청년 커플처럼.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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