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작곡가 김순남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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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작곡가 김순남을 기억하며

낡은 폐습을 없애고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열망이 어느 때보다 고조된 요즘, 해방공간에서 음악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려 한 김순남을 생각한다. 자타공인 당대 최고의 작곡가였으나, 40년간 역사에서 사라져야 했던 인물. 윤동주나 윤이상처럼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았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1948년 음악평론가 박용구는 ‘조선가곡의 위치’라는 글에서 작가적 개성을 지닌 김순남의 등장으로 비로소 조선가곡이 국제적 수준에 이르게 되었음에 열광했다. 서양음악 도입 초기 홍난파와 현제명의 노래들과 달리 김순남의 곡들은 시대와 지역의 감각을 개성적인 자기표현으로 창조해냈다는 것이다. 1988년 월북 작가 해금조치가 이뤄지자 여러 사람이 가슴속에 묻어뒀던 그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대표적이다. 1992년 월간 객석에 보낸 그의 특별기고문에는 1948년 배재 강당에서 들었던 김순남의 가곡 ‘산유화’와 ‘진달래꽃’, ‘농민의 노래’에 대한 감동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1917년 5월28일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서 태어난 김순남은 경성사범학교 졸업 후 1937년 작곡을 배우려 일본 유학을 떠난다. 1942년 귀국한 뒤로는 일제의 눈을 피해 지하음악서클 성연회 활동을 하면서 1944년 12월 첫 작곡발표회를 열어 제도권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한다. 해방이 되자 일제 잔재 청산과 민족음악 건설을 기치로 내건 ‘조선음악가동맹’의 작곡부장으로, ‘해방의 노래’ ‘건국행진곡’ 같은 50여곡의 해방가요를 쓰고 경성방직 파업 현장에서 공연하는 등 해방정국의 음악무대를 누볐다. 1947년 좌익 활동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노골화되며 ‘인민항쟁가’의 작곡가로 체포령이 떨어졌지만, 도피생활 중에도 예술가곡과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등을 작곡하며 창작활동을 이어갔다.

 

당시 미군정청 음악교육고문이던 일라이 헤이모위츠는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안타까이 여겨 줄리아드 음악학교로 유학을 주선했으나 김순남은 이를 거절하고 1948년 여름 38선 이북으로 피신한다. 1952년 꿈에 그리던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채 1년도 못 돼 본국 송환명령이 떨어졌고, 스승이던 아람 하차투리안 등 주변인들의 만류에도 귀국해 남로당계 숙청과정에서 창작 활동을 전면 금지당하는 예술적 사망선고를 받는다. 월북 직후 썼다는 가극이나 교향곡 등은 역사에서 지워졌고, 1960년대 함경도 어느 조선소에서 노동자로 살며 틈틈이 민요 채보를 했다는 기록만 전해질 뿐, 1980년대 초반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행적에 대해 알려진 건 없다.

 

해방공간에서 누구보다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우며 음악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했던 작곡가는 한반도의 어느 쪽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스러졌다. 한국의 고유한 감성을 현대적인 어법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한 그의 음악적 성취가 제대로 계승되지 못한 것도 안타깝지만, 현실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과 작가정신이 후대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 더욱 아쉽다.

 

일제에 부역했던 음악가들은 해방정국에서 좌익 척결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운 미군정의 비호하에 곧바로 음악계의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 잡는다. 이후 70년간 한국의 클래식 음악계는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지만, 그 과정에서 입시와 레슨비를 둘러싼 비리와 부조리가 끊이지 않았고, 온갖 불미스러운 일로 신문 사회면에 등장하곤 했다. 무엇보다 현실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세계에 안주하며 사회적 공감의 교두보를 마련하지 못한 것은 해방공간 사라졌던 음악가들의 실천이 제대로 평가되고 계승되지 못했기 때문 아닐까.

 

지금 김순남의 존재를 새롭게 소환하는 것은 단지 그의 탄생 100주년이 쓸쓸히 지나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에서가 아니다. 여전히 잔존하는 음악계의 잘못된 관행들을 청산하고 클래식 음악이 한국 사회의 소중한 예술적 자산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올바른 성찰과 반성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음악사에도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다시금 필요하다.

 

이희경 음악학자 한예종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