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노래를 들려드리려고 했다. ‘너무 짧아요’ 이것도 아니고 ‘어제, 오늘, 그리고’ 이것도 아니고 … 조용필 노래를 좋아하시니까 힘이 될까 싶어서 고르는데 영 가사들이 상황에 마땅찮다. 아버지는 암 투병 중이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치매도 심해지시고 불도저로 밀어버린 뉴타운 대상 지구의 폐허에서처럼 기억을 못 하시며 늘 배가 고프다 하신다. 그럴수록 말라가시는 아버지는 어렸을 적 등화관제 훈련하는 날이면 마루에 주욱 누운 4형제에게 6·25 전쟁통에 사람 살려낸 이야기들을 들려주시곤 했다. 우리 자잘한 상처까지 직접 소독해주시던 자상한 아버지, 하지만 군부독재를 옹호하시고 이사도 잦아지더니 매번 어디서 돈을 떼였다는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그러자 아버지는 고향과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사무쳐서 상실감과 우울증에 시달리셨다.
작년에 처음 암 수술이 끝났을 때 나는 아버지에게서 뭔가 변화를 읽으려 기대했던 것 같다. 집착을 버리시고 건강과 남은 생이 중요하다고 다짐하실 줄 알았다. 고통을 통해 사람은 뭔가 배운다고 했으니까 정치와 이념이 무슨 소용이냐 허허롭게 살다 가련다 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며칠 전 재발한 암 수술을 끝내고 약간의 원기를 회복하신 아버지는 배반당한 기억속으로, 다시 과거 속으로 들어가셨다.
그 과거 속에 나는 아버지가 싫어하는 일만 하며 살아왔다. 요전엔 고문생존자모임 ‘진실의 힘’ 재단 인권상 상패를 만들었다. 그때 언론인 김선주씨를 뵀는데 말씀은 안 드렸지만 난 그분의 칼럼 모음집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를 소중히 읽었었다. ‘마지막 사랑의 위상학’이라고 거창하게 붙인 내 작품 제목도 사실 그 제목에서 비롯했었다. 칼럼은 제목 느낌과 달리 정치인들의 탈당 사태를 보면서 쓴글이었는데 나는 거기서 모든 사랑했던 순간들에 대한 예의, 이별의 예의에 관해서만 곱씹었다. 그리고는 같은 봄날은 없으며 어디에도 함부로 대할 땅과 사람과 시간이 없으니 잘 헤어질 것을 준비하는 과정이 삶이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역사가 너무나 격동적인 것 같다. 돈 되는 것, 만나는 것만 챙기러 달려간 근대화 과정에서 헤어질 때의 예의를 차릴 수 있는 주체로 태어날 기회는 없었다. 언제나 역사는 배반 속에서 이루어졌다지만 군부와 재벌 권력들은 치고 빠지는 것 그리고 영원히 놓지 않는 것만 보여줬다. 온통 이념에 떠밀리고 개발 계획에 또 한 번 떠밀리고 그 홧병에 아주 떠나버린 가족과 이웃들이 유령처럼 떠돈다. 피눈물도 없는 돈기계들의 손만 들어주는 신자유주의 논리는 이별의 시간과 장소, 방법을 헤아리지 않고 선택할 여지마저 빼앗는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신 아버지도 그렇지만 강제된 이별 앞에서 마지막까지 존엄을 갖출 수 있도록 예의를 갖춰야 할 분들이 있다. 지난 7일, 세계 최대 규모 송전탑 건설예정지인 밀양에서 싸우다 서울시청 앞으로 올라오신 할머니들이다. “보상이고 뭐고 다 필요 없소, 지금 이대로 농사짓고 살다가게 해주이소.” 1979년 박정희 정권 시절에 만들어진 ‘전원개발촉진법’에 따르면 평생 살던 집과 논밭, 하루 아침에 한전 소유가 되어도 거부할 방법이 없다. 이 할머니들, 우리 아버지처럼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의 딸에게 투표하셨을 것이다. 이 송전탑이 우리 할아버지 공주 산소에 들어오면 아버지는 어떠셨을까.
'보상은 필요없다' 밀양희망문화제 (경향DB)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돌아서야 하거나 증오심을 갖고 떠나야 하는 이별은 원한의 뿌리가 깊게 내린다.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는데 삶과 일자리, 사람과 장소 사이에서 마지막까지 사랑할 기회를 갖고 기억을 짓밟지 않아도 되는 사회란 불가능한가.
어제도 아버지는 혼잣말로 중얼거리셨었다. “떠나기 싫어” … 네, 아버지 이해합니다.
임민욱 설치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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